글자가 뭉개져 보인다.
눈을 힘껏 감았다 떴다 하기도, 이리저리 비벼 보기도 한다. 아, 벌게지기만 하고 흐릿한 건 비슷하다.
뭐지? 시력이 나빠졌나?
왼쪽, 오른쪽 눈을 순서대로 가려가며 먼 곳, 가까운 곳을 바라봐 본다.
음, 시력이 나빠진 게 분명해. 그렇지. 라식한 지 15년이나 되었으니, 이제 안 좋아질 때도 됐지.
굳은 확신을 하고 안과로 향했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
마침, 첫째 아이도 학교에서 받은 시력 검사결과가 0.5라 하여, 아이와 함께 안과에 방문했다. 아이는 안과에 예약한 날부터 오늘까지 하루에 몇 번씩이나 걱정을 해댔다. 진짜 눈이 나쁜 거면 어떻게 하냐고, 안경은 절대 쓰기 싫다고 말이다. 아이를 얼르고 달래며 둘이 순서대로 검사를 받았다.
아이는 내내 징징 거렸으며, 나는 시력이 몇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의사 선생님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아이의 시력은 다행히 괜찮았다. 학교에서 검사받을 때 긴장하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안경까지 쓰진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다행이다.
그리고 내 차례.
밝은 빛으로 비춰 본 후 모니터에 있는 검사 결과를 훑어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노안의 시작입니다."
"예....?"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이어서 말씀하신다.
"앞으로 계속 침침한 증상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인공눈물 좀 넣어 주시고, 온찜질도 자주 해주세요. 불편해지면 다시 오세요. 그때는 안경을 맞추셔야겠네요."
"예? 왼쪽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는데요."
"1.0, 1.0입니다."
"아. 예..."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내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와는 달리, 왼쪽 어깨에 '노', 오른쪽 어깨에 '안'이라는 글자를 짊어메고 병원 문을 나섰다. 약국에 들러 인공눈물 두 박스를 결제하고 나오는데, 눈이 또 뻑뻑하고 사물이 겹쳐 보인다. 그 자리에 서서 박스를 뜯어 인공눈물을 또록 또록 넣어주었다. 아, 정말 더 또렷하게 보이기는 한다.
씁쓸하다. 진정으로 씁쓸하다. 아직 살아온 지 만 40년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노안이라니.
이마 앞쪽에 나기 시작한 흰머리는 뽑거나 가리면 되는데, 이제 시력이 더 심해지면 돋보기를 써야 한다.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해 한쪽 손으로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고 한쪽 손으로는 물체를 최대한 멀리 뻗은 채, 허리는 뒤로 한껏 밀어 글자를 보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아, 뭔가 착잡하다.
그날 밤, 눈을 비벼대며, 얼마 전 읽기 시작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괜히 노안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어제보다 글자가 더 뭉개진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인공눈물을 하나 뜯어 양쪽에 몇 방울씩 넣어주었다. 실눈을 뜬 채 책을 읽고 있는데, 여전히 기분 좋은 첫째가 폴짝폴짝 뛰어 오더니 쿨하게 한 마디를 던지고 본인의 책을 편다.
"엄마, 이거 책 제목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
"어떻게?"
"몰랐던 노안이 말을 걸어올 때"
"..."
아, 씁쓸하도다.
아, 착잡하도다.
오늘 밤엔, 책은 접어두고 온찜질이나 하러 가야겠다.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