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느도 닥치고, 블레어도 잠잠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조용히 공부를 하며 지냈다. 이제 대학생활도 끝날 때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나도 안정감을 찾고 싶었던 때였다.
이때 자주 튀어나오던 것은 ‘엘리사벳’. 여기도 저기도 기댈 때가 없으니 얘가 계속 나왔다. 또 시작이야. 나는 뭐가 되고 싶을까? 너는 꿈이 뭐니?
야, 너는 지겹지도 않니.
돈도 없고. 꿈 찾으려면 돈도 있어야 하는데. 이때 나타난 것이 ‘제인’이다. 내가 영미문학을 좋아해서 그러니까 자꾸 외국 이름이 나오는 건 참아라. 보는 소설책이 다 그쪽인데 어쩌겠어.
이 친구의 이름은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소설책 ‘제인 에어’에서 왔다. 이 소설책 주인공도 나처럼 블레어 비슷한 친구와 함께 살았지만 참 당찬 성격이었다. 나도 좀 당차 지고도 싶었고 블레어가 입을 닥치고 있었지만 이 현상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도 없어서 내가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자 했다.
엘리사벳이 주구장창 꿈이 뭐냐고 물어서 대답했던 것이 ‘연극배우’. 원래 나의 꿈이었다. 다중인격자에게 딱 맞는 직업 아니었겠어. 하나씩 내보내서 무대에서 연기하는 거야. 어때? 멋지지? 그러나 나의 꿈은 초장에 부모님께서 반대하셔서 좌절되었었다.
‘했으면 잘했을 거였어.’ 미련이 속삭였다.
‘네까짓게?’
역시 블레어. 쉬지를 않는다.
그 미련이라도 잡고 있고 싶어서 나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기회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정말로 그거 맞아? 그냥 인격들로 돌려 막기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하는 엘리사벳의 질문 따위는 씹어먹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진짜 뭘 하려 해도 뭘 배우려 해도 또 돈이 없네. 이건 돌고 도는 순환문 같은 건가.
왜 나가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독서 동호회, 그곳에서 나의 세 번째 남자 친구가 등장했다. 나는 그때 코피를 흘릴 정도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알바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내 인격들과도 다 잘 지내야 하니 오죽 피곤했겠어. 남자 따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그 동호회에는 서울대를 다니는 남학생 두 명도 함께 다니고 있었다. 외모도 준수했고 사람도 된 것 같았다. 관심을 가지려면 이 친구들한테 가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문제는 그 친구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거지. 여친이 있었는지 그것도 모르겠고. 그리고 블레어도 조용히 있다가 꼭 한 마디씩 했다.
‘네까짓게 뭘.’
아 좀 조용히 해. 닥치라고.
나는 닥치라고 하면서도 블레어의 이야기를 참 잘 경청했다. 이 와중에 속 시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나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 바로 세 번째 내 남자 친구이다. 이 사람은 나의 꿈에 관심이 있었고 나의 패기를 높이 샀다. 심지어 차분한 추진력도 있었다.
근데 사실 내 취향은 아니었어. 참 차분하고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을 해주기는 하는데 저 사람이랑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평생을, 크게 누군가한테 조언을 들으며 지배당하며.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네 꿈을 응원해주는걸.”
입을 여는 일이 극히 드문 엘리자벳이 말했다. 얘는 자기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흥분한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는 느낌. 그거 좋지.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응원해 주었고, 내 꿈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하지만 그냥 나의 관심을 사고 싶어서 그런 척하는 거면 어쩌지? 전에도 봤쟎아. 처음에는 누가 못해주니? 다 관심이 있다고 하지.
하지만 나는 엘리사벳의 성화에 그를 만나게 되었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 뿌듯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엘리사벳과 제인은 이 시기에 친구가 되었고 둘은 정말로 궁합이 잘 맞았다. 몽상을 가진 늘 꿈을 찾는 엘리자베스는 드디어 야무진 제인을 만나서 제자리를 찾는가 싶었다. 둘은 꿈을 꾸었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싶어 했다. 블레어는 드디어 잠잠해졌고, 나는 드디어 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다중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도 지낼 수 있겠어. 머릿속에서 여럿이 이야기하는 걸 듣는 건 때로는 재미있는데, 대부분 너무 속 시끄럽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위궤양을 달고 살지. 나는 조용히 이 둘의 조합을 지지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숨을 쉴 수 있겠어. 나의 다중인격 속에서도 몽상가인 엘리사벳과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제인이 함께 지낸다면 평생 평화롭고 안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매일 하게 되었다. 정열적인 사랑의 불꽃 따위는 없었지만 훨씬 안정적이었고 위로가 되었다. 그 첫사랑인 나쁜 새끼를 만난 덕분에 타오르는 정렬 따위는 믿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것은 못되었다. 나 자신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