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꿀처럼 달달했던

벌집꿀

by 정이든

매 년마다 그 해만의 고유한 연말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올해는 유독 평온하고 또 잔잔한 느낌이다. 연말 며칠의 단편적인 느낌이 1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겠으나 연간 일상에서 누적된 서사와 맥락, 오르고 내림의 귀결로 지금의 내 기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이가 들었나, 2026년에 대한 기대보다 2025년의 아쉬웠던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올해 특유의 평온하고 잔잔한 느낌은 나 자신으로 하여금 더 회고적인 사람이 되도록 종용한다. 과거만, 백미러만 보면서 운전하다 보면 사고가 난다던데 경계할 일이다.


1년간 조우했던 크고 작은 선택의 갈래들을 떠올리며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돌아간다 하여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경기를 뛰면 더 멋진 패스와 슛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다시 기회가 온다 한들 헛발질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를 굳이 헤집어 모험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다. 그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 한들, 그 이후의 나는 다시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백미러를 무시하고 앞만 보며 운전해서도 안된다. 지나간 잘못들을 매번 잊기만 했다면 나는 위태롭게 중앙차선을 넘나드는 아찔한 운전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며 미래를 향해가고 있다. 좌표가 조금씩 옮겨온 탓에 이제 2026년으로 한 살 더 나이 들어가고 있지만, 나는 내년에도 언제나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었고, 있으며, 있을 예정이다. 그러니 나의 1년을 돌이켜보는 행위를 스스로 비하할 필요는 또 없겠다. 단지 과하게 진지하거나 본격적이지 않으면 된다.


*


어제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벌집꿀과 카다이프 초콜릿을 토핑으로 시켜 먹었다. 연말이니 이 정도 호사는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벌집꿀을 쪼개 먹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달다. 단맛이 두뇌를 찌릿하고 자극한다. 앞으로 나는 벌집꿀을 생각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군침이 돌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끝자락에 굳이 새로운 후회를 만든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매번 군침이 좀 돌면 어떠랴. 후회는 무언가를 후회스러운 일로 정의해야만 공식적으로 후회가 된다. 맛있는 것을 먹고 만족했으면 될 일이다.


후회만 반복해서는 결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벌집꿀 조각을 더 크게 부수고 스푼에 올렸다. 대신 아이스크림을 크게 퍼 올리고 그래놀라까지 몇 개 올려 단맛을 중화시키는 나름의 보완절차를 거쳤다. 아이스크림을 저당으로 주문했으므로 이 정도는 선을 넘지 않은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스푼을 입에 넣기 전, 각종 단맛에 노출된 현대인으로 태어난 운명과 그에 따른 사명감을 떠올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냠, 사르르, 꿀꺽.


*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다 해치우고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트렸다. 달달함이 벌집꿀처럼 눅진하게 입안에 감돌고 있었다. 포만감까지 합세하여 나른한 덕분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후회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나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한 해를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올 한 해 에너지를 많이 투자했던 주요한 도전들을 몇 가지 떠올리게 되었다.


1.

연초부터 본격적으로 러닝을 시작해 그래도 꾸준히 제법 자주 달렸다. 다만 9월부터는 부서를 옮겨 정신이 없다는 핑계와 바람이 차가워졌다는 핑계로 1달에 기껏해야 1~2번 밖에 달리지 못했다. 헬스장도 예전만큼 다니지 못해 러닝머신조차 잘 뛰지 못했다. 반성한다. 하지만 곰도 겨울잠이 필요할 텐데 곰보다 연약한 내게도 나름의 숨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봄이 오고 얼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면, 기지개를 켜고 다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2.

브런치에 글을 매주 업로드했다. 1년간 매주 일요일마다 누락 없이 썼다. 무언가에 빠지면 단기간에 확 몰입하고 또 금방 싫증을 내는 내 성격상, 이렇게 긴 호흡으로 하나의 루틴이 탑재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성과다. 내년에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계속 글을 쓰면서 책까지 낼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다면, 이제는 독자들에게 쓰임새가 있는 글인지를 더욱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


3.

책을 40권 이상 읽었다. 오며 가며 훑어본, 완독 하지 못한 책을 합하면 50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제대로 다독하는 분들과 비교하면 비루한 숫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름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던 점을 스스로 높이 산다. AI와 숏폼이 범람할수록, 삶의 본질을 성찰할 수 있게 만드는 재미없고 어려운 책을 더 가까이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고유함을 유지해 줄 것이다.


4.

KPC 코치시험에 합격한 것도 뿌듯한 일이다. 직장인 월급쟁이 외길인생이 아닌, 다양한 길들을 뚫어 보는 시도가 조금은 유효해진 느낌이다. 코치 자격도 자격이지만, 실습을 하면서 거쳐간 많은 고객들과의 기억이 소중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방법과 깊이와 빈도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나 또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밖에도 부서를 옮긴 일, 원데이 클래스로 스쿼시를 시도해 본 일, 생일잔치를 파티룸에서 거하게 해 본 일, 혼자 홍콩 여행을 다녀온 일, 새로운 보드게임, 회사에서 주니어들을 대상으로 인간관계와 관련된 특강을 했던 일 등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체로 잘 뛰었고 나름 괜찮은 한 해였다.


특히,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수요일 저녁 경복궁을 같이 달리던 D와 J와 P, 같은 팀에서 동고동락하던 J와 또 다른 J, 아쉽게 다른 회사로 이직한 동갑내기 S, 홍콩에서 반겨주던 친구들, 가끔 내 브런치를 읽어주는 부산에서 선생님을 하는 대학교 친구 M, 둘도 없는 고등학교 친구 O와 C, KPC를 준비하며 5회기 코칭을 함께 해주신 K코치님, 나의 보잘것없는 코칭이 상을 받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시던 L코치님, 그리고 가족들.


의식의 흐름대로, 수상소감처럼 한 명씩 쓰다 보니 미처 쓰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떠오른다. 다 쓰려면 밤을 새야 할 판이다. 이래서 연말 시상식에서 연예인들이 수상소감을 짧게 할 수 없나 보다.


이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들이 1년간 나를 지탱해 주었다. 승진을 한다든지, 체지방률 15% 달성이라든지, 순자산이 얼마라든지 하는 인생의 척도들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숫자나 yes/no로 측정할 수 없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추억의 빈도나 해상도 또한 중요하다 믿는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발전일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상상과 사유들은 선명하지 못하여 큰 구름처럼 잔상만 남아 있다. 따라서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용하기 어렵다. 형용하기 어렵다고 해서 의미가 적은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고 비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구름은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다. 바람에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존재로서 나의 생각들도 한편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꾸준히 피어오른다면 언젠가 글로써, 말로써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


슬슬 졸림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벌집꿀의 단 맛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나는 올 한 해를 달달했던 한 해로 평가할 것이다. 막상 벌집꿀스럽게 달달했던 순간들은 없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최신효과라고 했었나, 마지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심리학 이론의 힘을 빌려 한 해의 끝자락에 입맛을 달달하게 점령한 벌집꿀 토핑의 단맛으로 기억하면 될 일이다.


침샘을 녹이는 꿀맛. 그 꿀맛을 올해 나의 달리기와 글쓰기와 책과 코칭, 그리고 떠오르는 추억들과 엮어 본다.


주말 동안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벌집꿀처럼, 2026년도 달달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