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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제이 May 07. 2022

진심을 진심으로 받을 용기

우리의 관계가 가장 빛나는 순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뛰쳐나가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순간. 그 순간은 특별히 날씨가 흐리거나 힘든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날씨가 좋은 날 바쁘게 일을 하는 도중에 불현듯 불청객처럼 찾아오곤 한다.
 

 그날도 그러했다. 사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연초부터 계획되었던 팀원의 충원이 늦어지면서 하루하루 일을 쳐내기 버거운 나날들이었지만, 여전히 하루를 살아가기에 의욕은 충만했다. 일과는 여느 때와 같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기분 나쁜 일이 있지도, 그렇다고 기분 좋을 이유도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피곤해서였을까, 아침에 마신 커피가 평소보다 밍밍해서였을까. 갑자기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둥둥 떠다니던 감정은 지면을 향해 고도를 낮추었고 사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영층 보고가 필요한 굵직한 3~4개의 업무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는데, 관련된 전화와 메일과 대화를 처리하다 보니 기분이 회복될 새가 없이 텐션만 높아졌다. 나는 팀장과 평소처럼 업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감정과 이성의 괴리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대화가 멈춘 틈을 타 슬쩍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도 나처럼 고요한 채  하강하는 마음의 고도를 숨기며 겉으로만 살아가고 있을까. 그 하루들을 버텼을 때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와 함께 일로만 엮인 내 앞의 당신도 어쩌면 나처럼 거친 감정이 마음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는 회사의 누군가와 일이 아닌 인생을 얘기할 순간이 올까.




 며칠 후, 친한 입사 동기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근황 토크와 함께 회사일, 사는 얘기로 가볍게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초밥집에서 시작되어 테이크아웃 커피와 함께 청계천 산책길을 따라 한참을 이어졌다.


 점심시간을 꽉꽉 채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대화 덕분에 1시에 예정된 회의를 놓칠 뻔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인맥을 넓히겠다는 내포된 목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던 여느 때의 점심시간과는 달리, 대화만으로도 평온하고 아늑한 하여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간만에 나는 일이 아니라 내 일상을 말할 수 있었다. 기꺼이 고민을 얘기하였고 상대는 경청하고 본인의 생각을 대답해 주었다. 짧은 1시간 동안 내가 내뱉은 단어들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내 본질에 가까웠으리라.


 팍팍하여 건조한 삶이라 생각했던 순간들 중에도 타인과의 진실된 순간은 의외의 순간에 찾아와 의외의 울림을 주곤 한다. 내가 주저하여 말하지 못했던, 또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캐내지 못했던 진심을 상대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희소하여 무척이나 값지다.


 그 순간은 많은 우연들이 겹쳐 일어난다. 평소 당신과 나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그날의 날씨, 심지어는 그 먹은 음식까지도, 우연이 필연적으로 겹쳐 마음을 열도록 종용한다. 


 고등학교 기사 시절, 늦은 밤 학교 벤치에 앉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얘기하던 친구와의 시간.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생활에 대한 속마음을 토로하던 당신과의 술자리. 밤 바닷가를 산책하며 같이 나누던 말들과 그날의 별빛. 그 순간들은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 불현듯 내 기억에 되돌아와 삶의 순간들을 반추시키고 거친 마음을 고르게 다듬어 준다.


 쉬운 경험이 아니기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진심 어린 순간들은 특별하다. 인생을 살면서 진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삶을 돌이켜보건대 그런 경험을 함께 한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어쩌면 타인이 아닌 나 자신조차, 내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제 쉽게 연락하기도 어려운 사이가 되었지만, 그렇기에 내가 더 열심히 기억하고 열심히 떠올리리라 다짐해 본다.


 그 순간들을 모아 한 권의 일기를 만든다면, 그것은 내가 열심히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역사책이 되리라. 매일 쓴 일기가 아니라 드문드문 이어지더라도, 순간순간의 점들을 연결해보면 충분히 값진 의미가 있는 선이 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마주할 당신께도 기대하고 싶다. 진심을 말할 때,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무척이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함을 알기에, 나는 그 노력을 쉬이 가늠하지 못하겠지만 기꺼이 감사하고 소중하겠다. 내가 선뜻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던 내 진심을,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말하는 순간에 당신이 그것을 오롯이 진심으로 받아주었으면 한다. 가식과 포장 같은 것들이 일부 섞이지 않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겠으나, 또는 빙빙 돌려하고픈 말에 향하기까지 굽이진 길을 우회할 수는 있겠으나, 내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려 준다면 그것만으로 좋겠다.


 물론 나 또한 당신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진심들내가 받아들임은, 타인에 대한 벽이 높은 로서는 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테지만, 의미 순수히 몰입하여 수용할 수 있을만큼 용감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당신 듣지 못해도 괜찮다. 당신의 앞에 언제나 내가 있으리라 자신하는 것은 만용에 가까울지 모다.


 다만 삶 속에서 그런 사람을 꼭 만날 수 있기를. 내가 아니더라도 타인과 숭고히 교감하는 순간이 당신 기억의 복도 한편 깔끔한 액자 속에 보관될 기회가 자주 있기를. 그로 인해 당신이 더욱 당신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언젠가 당신과 내가


         카페에서, 술집에서, 밤하늘을 보며, 운동장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말로든, 카톡으로든,

         무엇이든 언제였든 어떤 방식이었든

         함께 던 순간의 반짝거림이 

         종종 억에 떠오르 바랍니다.
  
         나란히 앉아 마주했던 그날의 야경처럼
         우리가 다시 필연처럼 만나,


         삶을 진심으로 살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반복되고 또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2022년 5월의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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