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제이 Jun 01. 2022

연어초밥 같은 관계

한남동에서 초밥을 먹다가 문득

 업무 미팅이 있어 한남동에 들렀다.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한 킥오프 미팅이었는데, 작년에 몇 차례 같이 일을 했던 분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자리라 무척 반가웠다. 팀장님과 담당자분이 워낙 말씀도 잘하시고 유쾌하셨던 덕분에 치열하지만(?) 좋은 분위기에서 미팅이 마무리되었다. 


 미팅이 끝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팀장님이 추천해 주신 근처 모 초밥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일 얘기만 하던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일상 얘기를 하는 것은 조금은 긴장되지만 흥미로운 기회였다.


 게다가 초밥이라니. 초밥은 늘 옳다. 대학교 시절에는 돈이 없어 큰맘 먹고 가야 했던 초밥집을 이제는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라는 맥락 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팀장님의 추천을 받아 모둠초밥 메뉴를 시켰고, 잠시 취미와 MBTI와 혈액형 관련한 이야기가 오갔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나 한남동 팀장님과 팀원분은 MBTI가 E(외향형)로 시작했다. 유쾌하고 에너제틱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빛깔부터 기분 좋은 초밥 12피스가 나왔다.

 

그날의 초밥+_+

 

 식사를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12개 초밥 중 어느 초밥을 먹어도 맛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12피스를 동시에 입에 넣을 수는 없는 까닭에, 짧은 순간 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어느 초밥을 먼저 먹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초밥 본연의 맛을 가장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광어 초밥을 먼저 먹었지만, 먹는 순서를 가장 고민한 것은 가장 좋아하는 초밥 중 하나인 연어 초밥이었다.




 그날의 초밥을 떠올리며 문득, 나는 당신에게 어떤 초밥 같은 존재일지 생각해 본다. 우리의 관계가 젓가락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최애 초밥 같은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고 나쁨과 선호와 비선호를 가리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우리네 인간관계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보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 가장 먼저 젓가락을 기울였을 때,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내가 줄 수 있다면.


 관계의 우선순위가 높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내가 선호하는 누군가가 나를 선호할 수 있는 경험은 인생에서 큰 위안과 에너지를 주곤 한다. 그 경험을 기대하며 오늘도 우리는 약속을 잡고 맛난 음식을 먹으며 때로 술잔을 기울이며 사는 얘기를 터놓고 상대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람의 1st가 될 수는 없다. 대신 최소한 비려서 먹지 못할, 또는 주문조차 되지 못할 음식 같은 관계는 되지 않기 위해 매일 직장에서, 모임에서, 어딘가에서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시간과 대화와 생각을 나눈다. 그리하여 너무 낮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높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에서 타인과 관계의 우선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무척 즐거운 과정이겠으나, 나 같이 MBTI가 I(내향형)인 사람들에게는 에너지 소모적일 때도 있다.


 그래서 바라건대 타인과의 적정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면 더 좋겠다. 억지로 향수를 뿌리고 시간을 쏟지 않아도, 당신과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교집합을 발견하고 기대했던 만큼 가까울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와는 무리하게 친함을 강요받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필요한 만큼의 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초밥이라 마지막까지 아껴 둘 초밥이고 싶다는 기대도 가져 본다. (이 날의 나 또한 가장 좋아하는 연어초밥을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먹었다.) 내게 연어는 다른 해산물이 주지 못하는 새초롬함을 품고 있어, 식사를 완결성 있게 마무리하게 해 준다. 우리의 관계가 이 날의 연어초밥 같은 관계가 된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으리라.


 그렇지, 사실 순서나 시간이 중요하진 않다. 우선순위가 높다는 것이 꼭 지금 당장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관계가 당신에게 주는 의미가 그 자체로서 의미 있길 바란다. 언제 만날지, 언제 연락할지, 언제 함께 할지가 중요하지 않아 언제 만나도, 언제 연락해도, 언제 함께 있어도 의미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모든 순간 모든 날 당신의 우선순위에 내가 최우선일 수는 없다. 그것은 가족, 절친, 연인, 그 어떠한 관계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나는 내가 당신의, 당신이 나의 우선순위를 계속 의식하고 고민하게 되는 사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의 순서가 도래하여 우리가 마주한 그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만큼은 달짝지근한 연어초밥처럼 행복감을 주는 사이가 되길.





 당신이 언젠가 한 번쯤 연어초밥 12피스를 시키는 순간을 그려 본다. 그렇게 오롯이 우리가 우리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좋겠다. 그 순간만은 초밥 한 피스 한 피스가 즐겁고 기분 좋을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의 우선순위에 없더라도 그 순간만은.

작가의 이전글 진심을 진심으로 받을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