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간의 종말
인생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며, 공짜라고는 죽음 밖에 없는데, 그 또한 삶과 맞바꾼 것이다.
-엘프리 데 옐리네크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E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E는 무당이었다. 귀신을 보거나 죽은 사람을 본다거나 그런 무당이 아니라, 가끔 미래를 보는 그런 무당이었다. E의 엄마도, E의 엄마의 엄마도 무당이었다. E의 할머니는 꽤 유명한 점술사였고 타로도 배워 익혔다. E의 엄마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지만 그걸 직업으로 삼진 않았다. E는 두 사람보다 훨씬 어릴 때 신내림을 받았다. 13살이었나? 신내림을 받을 때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오기 전부터 미리 알고 제사를 치러 버린 할머니 탓에 힘들지도 않았다. 단지 무거운 무당옷을 입고 내내 기도하고 있는 게 힘들 뿐이었다. 그게 E의 가문의 방식이었다.
E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하지만 다른 성인 무당들보다 훨씬 능력치가 뛰어났고 정확했다. 때로 귀신을 보는 것도 가끔 있었지만 아주 기운이 강한 귀신이 아닌 이상 보지 못했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E는 미래를 보았다. 대략 한 2달 후의 미래, 딱 그 정도. 가끔 자다가 볼 때도 있고 그냥 무언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꿈을 기록하는 게 익숙했다.
E가 무당이 된 건 13살 때의 일이었다. 신내림을 받은 게 13살 때의 일이고, 그전부터 이상한 걸 보거나 미래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신기가 꼬여 있어 미래를 볼 때면 머리가 깨질 듯 아프거나 가위에 눌렸다. 주로 보는 것도 좋은 것들이 아니라 더러운 것들이었고.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귀신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것도 잘했다.
오히려 E의 엄마가 귀신만 보면 울렁증이 난다며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거나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 엄마, E 중 귀신을 주로 보는 건 엄마지만. E의 이모는 무당이 아니었다. 신기가 있긴 있지만 미미하고 효과도 별로 없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정도의 신기였다. E의 눈에는 이모의 삶이 훨씬 편해 보였다. 물론, E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E가 종말을 알게 된 건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먼저였다. 종말으로부터 30일 전이었다. 위에서 말했듯 E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 종말로부터 30일 전, 종말의 시간, E는 미래를 보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미래를 보기 전, 후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러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딱따구리 같은 게 머리 두개골을 딱딱 쪼아대는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고대 치료방법처럼 머리뼈를 조금 깎아내버리고 싶은 고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끊임없는 두통에 짜증이 났다. 미래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나온 바닷가 풍경가 새카만 암흑이 다였다. 보여줄 거면 똑바로 보여주지, 바다로 가라는 건가?
침대에 털썩 누워 끊이지 않는 두통을 해결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별다른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갈고닦은 그림실력을 바탕으로 미래를 볼 때 봤던 바닷가를 그려보았다. 대충.. 주변에 사람은 없었고 파도가 좀 거세게 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모래는 좀 많이 하얗고 옆에 바위가 있었다. 바위가...
아, 기억도 안 나. 제대로 보여줄 것이지..
대충 기억과 의식에 따라 그린 그림은 파도가 거세게 치는, 바위가 있는 바닷가 그림이었다. 머리가 아파 제대로 그릴 시간은 없어 똑바로 그리진 못한 상태였다. 대충 구기듯 접어 어딘가에 끼워놓고 다시 두통을 없애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바다, 암흑? 그럼 밤바다인가? 아... 너무 단순한 생각뿐이야. 해답을 얻으면 두통이 끝나려나?
깜빡 잠든 E는 꿈에서 더 긴 미래를 보았다. E는 해변가에 서있었다. 바람이 불어 모래알이 발을 간지럽혔고,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피하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E의 웃음소리인지 다른 사람의 웃음소리인지 헷갈렸다. 파도가 두 번 치고, 다음 파도가 밀려오다 말고... 잠에서 깼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통은 끝나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울렁거림이 남아있었다.
방금 꿈은 뭐였지? 분명 같은 곳이야, 똑같은 바위였단 말이야..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E는 7일간 똑같은 꿈을 꾸고 똑같은 시간 미래를 보았다. 그러니까 7일 내내 머리가 아팠다는 소리였다. 더 구체적이게 변하지도 않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똑같았다. 꿈을 꾸면 발에 스치는 모래로 시작해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 거센 바도 소리와 바위, 그리고 새카만 암흑으로 끝났다. 너무 짧은 꿈인데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그 꿈을 꾸고 나면 두통에 잠에서 깼다. 지긋지긋해, 7일 내내 이럴 건 뭐야? 잠은 제대로 자게 해 줄 것이지.
E는 두통을 감추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지라 주변 사람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강한 신기 때문이겠지, 안에서 뭐가 꼬였나 봐. E는 가끔 틀리기도 하는 미래 예측에 별로 없었고 미래가 사라지는 게 아닌 이상 미래에 관심이 없었다. 위험만 피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뒤숭숭한 꿈에 슬슬 지쳐갈 때 즈음 악몽은 끝을 맺고 새로운, 아니, 새롭다기보다 원래 꿈보다 더 짧아졌다. 물론 딱히 좋은 변화는 아니었지만. 오직 암흑만이 존재하는 꿈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암흑. 그 꿈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단 이틀. 이틀 간이 꿈은 암흑이었다. 가위눌린 듯 깨고 싶어도 깰 수 없었다.
그렇게 9일 간 이어진 악몽은, 아주 깔끔하게, 10일 차에 사라졌다. 의미를 알아냈기 때문일까.
종말.
그건 종말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종말. 그리고 그 종말을 E는 바닷가에서 맞을 것이고, 아주 한순간일 것이었다. 종말은 길지 않을 것이었다. 아주 빠를 것이었다.
E에게 종말은 다른 인간들에게처럼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였다. 하고 싶은 거나 해보고 싶은 게 많은 E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끝내고 싶은 건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엘프리 데 옐리네크의 말처럼 죽음은 삶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죽음이나 종말이나, 삶이 끝난다는 건 똑같으니까.
E의 집에는 E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고 있는 귀신, 정확히는 천계°로 안 간 영혼이 있었다. 영미 씨는 아직 이승에 미련이 많이 남아서 천계로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영미 씨는 32살로,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약 때문에 사망했다. 다른 두 병원에서 준 약이 같이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약이었던 것이었다. 영미 씨는 좋으려고 먹은 약 때문에 허무하게 죽었다.
영미 씨의 자취방이 이곳이었어서, 죽고 나서도 여기에서 맴돌고 있었다.
영미 씨는 귀신치고 너무 잘 보였다. 집안을 활보하며 잘 지냈다. 어릴 땐 너무 선명해서 같이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영미 씨가 귀신이라는 걸 안 건 7살 때의 일이었다. 영미 씨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나갈 수 없었다.
영미 씨는 E와 똑같은 때에 종말을 알게 되었다. E의 꿈속에서 똑같은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미 씨는 E의 꿈을 들여다보며 꿈을 꾸지 못하는 마음을 달랬다.
어느 날 영미 씨가 말했다.
"종말을 두려워하지 마. 고통은 아주 짧아."
E는 이해할 수 없었다. 종말이라니, 아주 아플 것 같았다.
E는 답했다. 두려움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고. 영미 씨는 흐르듯 말했다.
"종말의 순간에 느끼는 고통은 너의 삶의 1%도 차지하지 않을 거야."
며칠이 지나서야, E는 영미 씨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십몇년을 살았는데 고작 그 몇 초쯤이야.
영미 씨는 그 이후로도 E의 곁을 맴돌았다. 놀랍도록 차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E가 미련해 보였다. 가족들한테라도 말하는 게 어때?라고 물으면, E는 단호하게,
"그럼 남은 한 달 내내 제사만 해야 할 거예요. 그건 영미 씨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거고요."
라고 답했다. E의 할머니가 제사에 집착하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영미 씨는 일주일 만에 E를 설득하기를 그만뒀다. 하지만 E에게 죽기 전 하고 싶은 게 없느냐고 캐묻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E는 슬슬 귀찮아져서인지 짧게 대답했다.
"다른 귀신들 보고 싶어요."
영미 씨가 있는 이승 외에도 두 가지 세계가 존재했다. 천계, 그리고 공허. 공허는 이승과 천계 사이의 공간이다. 공식적인 뜻은 이승에 남을 수 있으나 천계에 가고 싶지 않은 영혼들이 머무르는 곳, 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천계에 가려고 영혼들이 대기줄을 서 있는 곳이었다.
"공허에 있다는 영미 씨 친구 말이에요."
여기서 잠깐, 현재 공허.
제인 씨는 조금 양아치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죽은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대학교 강의를 땡땡이치고 바이크를 타러 간 적은 있지만 문신은 하지 않았고, 몰래 술을 마신 적은 있지만 담배를 피우진 않았다. 제인 씨가 죽은 이유는 정말 단순 사고였다. 놀이공원 안전장치가 잘못 걸려, 타다가 공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제인 씨는 죽었다.
보통 불의의 사고, 타인의 문제로 죽으면 금방 천계를 갈 수 있으나, 제인 씨는 살면서 친 사고가 조금 많아 천계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E는 제인 씨를 좋아했다. 멋있는 사람 같았다. 심지어 거기에 공부도 잘했고, 전공은 피아노였다니. E에게 제인 씨는 정말 멋있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제인 씨는 아직 공허에 있어요?"
영미 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고. 영미 씨도 제인 씨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승에서 머무르다가 바로 공허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허도 나름 규칙이 있는 곳이라 새치기하고 가기 어려웠다.
E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금방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원래도 자꾸 캐묻는 영미 씨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생각해 낸 대답이었던 터라 별로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떠올릴수록 제인 씨가 보고 싶었다. 제인 씨는 종말이 온다고 하면 쌤통이다,라고 유쾌하게 말할 것 같았다.
또한 가장 궁금했던 점은 제인 씨의 외적인 모습이었다. 카리스마 있는 짧은 검은색 쇼트커트머리에 피어싱이 두 개 있고, 키도 큰 데다 얼굴도 작아 옆에 서있기 민망한 미모라고 영미 씨는 말했다. E는 영미 씨가 제인 씨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늘 영미 씨는 참 표현을 못하는구나, 싶었다.
E가 처음 제인 씨를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4일 뒤였다. 줄을 서있다 지친 제인 씨는 오랜만에 친구라도 보자,라는 심정으로 이승에 내려왔다. 그리고 그날, 종말 소식을 들었다.
그때 E는 제인 씨가 강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제인 씨는 아쉬워하고, 불안해했다. 이승에 남은 사람들이 고통스럽지 않은 마지막을 맞았으면 한다고 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제인 씨는 쇼트커트와 단발 사이의 머리 스타일에 피어싱과 진한 화장, 큰 링 귀고리에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다. 제인 씨를 본 E의 감상평은 최고의 누아르 여주인공,이었다. 확실히 멋있어, 영미 씨, 표현 잘하네.
제인 씨는 E는 보고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신기가 아주 강해. 이 정도면 종말 해도 살아남을 판이야."
제인 씨는 웃음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새빨간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가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E는 그런 제인 씨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종말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인 씨를 롤모델로 삼고 살아갔을 테지.
"근데 말이야, 인류의 종말이라면 공허와 천계는 어떻게 돼? 이미 죽었으니 안 사라지려나?"
E는 아마 안 사라질걸요,라고 중얼거리듯 답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죽지 않는다. 환생하지 않는 한.
"그럼 천계랑 공허 정말 바쁘겠는 걸.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온다니."
제인 씨는 또다시 그 매력적인 표정으로 웃었다. 아마 제인 씨의 웃음으로 제인 씨 주변 5m가 밝아졌을 것 같았다.
"제인 씨, 죽음이 허무하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질문이었다.
"... 죽음 중 제일 좋은 죽음은 불의의 사고야.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하되, 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절대로 내 탓으로 돌리지 못하거든."
제인 씨는 딱 한 시간, 이승에서 머무르고 천계로 올라갔다. 사실 공허가 줄을 서 있는 게 아니라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공허도 정말 체계적인 곳이구나.
제인 씨는 종말의 소식을 듣고 영미 씨와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보러 떠났다. 영미 씨와 제인 씨는 30년 만에 만나 30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종말 소식이 퍼졌다. E는 내심 다른 무당들은 이제껏 몰랐나, 싶어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뭐, 이나저나 이제 남은 시간은 7일뿐이지만.
아직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은 7일은 제삿날이라는 걸.
물론, 사람이 죽어서 제삿날인 게 아니라 굿을 하는 제삿날이다.
E에게 30일간의 종말은, 제인 씨를 만난 30분을 위한 시간인 것 같았다.
°단어설명
무복 : 무당이 굿을 할 때 입는 옷. 본 작품에서는 한복 형식의 무복을 뜻한다.
신기 : 神氣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운기. 신의 기운을 뜻하기도 한다.
천계: 天界 불교의 십계 중 하나로, 십선을 닦으면 간다고 하는 하늘 위의 세계를 뜻한다. 본 작품에서는 사후세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