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인간관계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M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어, 언니. 잘 지내지? 그럼~ 아.. 당연하지. 조만간 갈게."
전화가 끊기고 M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지인들을 못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너무 바쁘게 산 탓이었다.
아무래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며 바쁘게 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평범하다고 해봤자 늘 바쁘기만 한 회사원의 삶이었다.
주말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고 못 만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그렇게 나름 M만의 인간관계를 쌓아왔다. 원래도 인간관계에 중요시하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M이었지만 회사원이 되고 바빠지며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 같았다.
수두룩하게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는 폰 화면의 스크롤을 휙휙 내렸다. 만나고 친해지면 연락처부터 교환하는 M이었기에 잠깐 친했다가 지금은 연락도 안 하는 연락처가 수두룩했다.
삭제를 안 한다니보다는 너무 많다 보니 따로 정리를 안 한다,에 가깝달까. 어느샌가부터 서먹해진 친구도 '연락할 일이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싶어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지우지 않고 묵혀두던 연락처들이 쌓여 원하는 연락처를 찾으려면 검색 없이는 안 되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주말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연락처를 뒤졌다.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기에는 빠듯하니 뒤지다 보면 떠오르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주말마다 연락을 하는 걸 낙으로 삼는 M의 주말은 절반은 연락처 뒤지기, 절반은 연락하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휙휙 스크롤을 내리던 M의 손이 뚝 멈췄다. 위의 알림 창에 온 문자 알림 때문이었다.
'웬일로 김유미가 먼저 연락을 한데?'
유미는 사람들에게 관심 많은 듯 무심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일 없이는 연락이 뜸했고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사에 들어와 처음 만난 사람이자 처음으로 친해진 사람이었다.
무심코 누른 알림 창은 메시지 화면으로 이어졌고, 이내 충격적인 소식이 M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빠르게 창이 바뀌는 탓에 보건 말건 결정할 틈은 없었다.
-언니
-인류 종말 한다는데? 소식 들었어?
-미쳤어...
충격적인 소식과는 다르게 흔들림 하나 없이 만화를 읽듯 신기해하는 모습이 어색했다.
그와 반대로 그 문자를 읽은 M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종말? 세상이 끝난다고? 이렇게 갑자기?
M은 빠르게 검색창을 클릭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든 뉴스, 인기 검색어가 종말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M의 손가락이 떨리며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과연 절망적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심지어 지구가 종말 하는 것도 아니고 인류가 종말 하는 거라고?
별로 길지 않은 기사를 읽는 건 1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 빨리 읽는 편이기도 했지만.
M은 뉴스 기사를 다 읽은 뒤 조용히 손을 떨궜다. 그 기사를 다 읽었다고 한들 드라마처럼 더 어두워지고 추워진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늘은 비는커녕 화창했다.
M은 반신반의했다. 설마 그러겠어? 싶은 마음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내심 유미도 그렇다는데 안 믿을 건 또 뭐지? 요즘 과학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믿어야 하는 건가?
M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일상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잠깐 멈춰두었던 노래를 다시 틀고 종말 소식은 억지로 나마 마음속 깊숙이에 밀어 넣었다.
M은 다시 손을 들어 띄워진 앱들 중 연락처를 클릭했다. 연락처를 스크롤하던 중 주말 일과에 포함된 연락처들에서 손이 멈췄고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M의 연락처에 유일하게 '그' 호칭을 붙인 사람, 한히원.
한때 거의 대학의 아이돌이었나. 히원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큰 키, 차분한 목소리와 멋있는 외모에 인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히원은 성격이 끝내줬다.
M 또한 히원을 존경했다. 공부도 잘하는데 인기도 많고, 성격도 좋으니까. 히원과 같은 과였던 M은 본능 같은 놀라운 사교성을 발휘해 히원과 금방 친해졌다.
선배, 지난주에도 전화를 했었는데.
연결음이 두 번 채 울리기 전에 히원이 전화를 받았다. 히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바빠 보였다. 그런 목소리의 히원이라니, 영 어색했다. 히원 선배는 늘 여유 넘치는 게 익숙했다.
"여보세요, 선배? 나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M. 어제 전화한다고 해놓고 안 했더라? 좀 서운했지."
히원이 차분하고 조금 높은 목소리로 이런 농담을 하니, 히원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긴장했을법한 말이었다.
"아, 맞다, 그거. 선배 미안해요. 깜빡했네. 어제 일이 많아서 말이야. 아, 선배 여행 준비 중인가?"
M의 목소리가 가볍게 튀듯 울렸다. 정말이지 히원이라는 사람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어, 내일 아침에 출발하니까. 그나저나 종말 소식 들었어? 어때?"
"아.. 그거요? 좀 놀라긴 했지. 선배는요?"
M이 살짝 떠보듯 물었다. 선배 같은 사람도 종말을 신경 쓸까? 선배 같은 사람이라면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을까?
M의 말에 히원이 잠깐 침묵했다.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히원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가 다시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좀 아쉽긴 하네."
M은 왠지 모르게 살짝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선배도 아쉽긴 한가. 히원은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M도 아쉽지? M은 해보고 싶다고 한 거 많았는데."
전화 너머로 히원의 씁쓸한 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M은 괜찮아? 많이 충격받았을 것 같은데."
히원의 말에 M이 잠깐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M은 그런 사람인가?
M은 다른 사람들에게 히원 선배 같은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멋있고, 강하고,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 이런 소식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하지만 막상 여기까지 와보니 그 계획은 실패한 게 분명했다. 사람들에게 M은 조금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는 듯했으니.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히원이 들었을지 살짝 고민했다
"... 나야, 뭐. 놀라긴 했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전화 반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부모님은 꼭 찾아뵈고. 말 안 해도 잘하지?"
히원의 말에 M은 다시 살짝 웃었다. 어린애 돌보듯 하는 말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히원 선배뿐이었다.
"그럼, 선배. 날 뭘로 보고. 그럼 여행 잘 다녀와요."
전화가 끝나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문득 오랜만에 그녀 이름이 떠올랐다. 이현화. 아마 M의 가장 친한 친구였나. 친구 중에서는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었나.
전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한 패턴마다 심장이 떨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갑자기 전화를 걸어 놀랐을까?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겠지?
"여보세요? M? 너야?"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밝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M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현화만의 특이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놓은 것 같았다.
이현화. 일본인 혼혈이었나. 끝이 올라간 고양이 상 눈매와 카랑카랑한 목소리, 천진하게 웃는 그 미소가 좋았다. 공부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남몰래 노력하는 그 모든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니 M은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참 많은 사람을 존경해 왔다.
"어, 현화야... 오랜만이다."
M의 말에 현화는 잠깐 멈칫하다가 살짝 웃는 소리와 함께 답했다.
"오랜만이지. 종말이라기에 전화한 거야?"
현화의 말에 M은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응, 그런 거야.라고 하기에는 너무 야비한 놈 같았다. 끝나기 직전에야 전화하는 그런...
M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현화와 히원을 보며 사람들 시선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변한 게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네가 널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M의 침묵에 현화가 흐흥, 하고 웃는 소리를 살짝 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조금 감동인걸, M. 종말이라기에 전화한 사람이 나라니."
'역시 현화는 현화인가.' M에게 다시 현화라는 사람의 매력이 떠올랐다. 하긴, 현화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종말이라는데 패닉 하나 없고.
M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현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화의 목소리가 M의 귓가에서 울렸다.
"잘 지냈어? 나는 뭐... 말할 것 없이 잘 지냈지. 통역사 일이 잘 맞나 봐.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기도 하고."
고요하게 울리던 M의 심장이 점차 조용해졌다. 잘 지내고 있구나, 일에 만족했구나. 현화는 여전히 내가 알던 그 현화구나.
-
"그래, 다음에 봐. 다음이 언제가 될진 몰라도."
가벼운 농담을 곁들인 끝인사가 전화를 끊었다. M은 잠깐 전화가 끊긴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살짝 웃었다. 이현화, 그 가벼워 보이고 깊은 그 사람은 여전히 좋았다. 여전히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현화의 가벼운 농담으로 전화가 끝나고, M은 소파에 누웠다. 그러다 문득 잊고 지내던 그분이 떠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던 그 선생님.
M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할법한 분이다. 해숙 선생님. 고등학교 때 만났는데 정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여보세요? 해숙 선생님, 저 M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전화드려요."
전화 건너편에서 해숙 씨의 잔잔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M,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
"네, 선생님. 다음에 봬요. 건강하세요."
전화가 끊기고 M은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전화 몇 통 했는데 피곤했다. 두 사람 모두 활기찬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전화였을 뿐인데. 씁쓸함과 아쉬움, 부러움 등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는 도중 일어난 피로감인 것 같았다.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데 M의 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M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숨을 쉰 건 엄마의 전화가 싫어서가 아니라 피로감 때문이었다. M이 불효녀인 건 맞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까.
"응, 엄마."
M의 차분해진 목소리와 달리 전화 반대편에서는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M! 종말 소식 들었지? 어머, 어떡해. 우리 딸 이번에 승진 아니었나? 아쉬워서 어떡해. 여행 가고 싶다면서 그것도 못 가고... 무섭진 않아? 이제 남은 7일이 끝인데... 아유, 엄마는 무서워서 못 살겠다, 정말."
흥분한 목소리와 빨라진 말에 M은 살짝 씁쓸하게 웃었다.
엄마, 나도 알아. 7일 뒤면 종말이라는 거. 근데 있지, 이상하게 전 별로 무섭진 않네요. 승진? 아, 그거야 별로 안 아쉬워요. 종말 한다니까 돈 따위 별로 신경도 안 쓰여. 여행이야 갈 생각도 별로 없었고..
속마음을 말하면 그것도 불효 같았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종말 한다는데 돈이 중요한가.
인생에서 중요한 건 인연이지. 살아가며 소중하게 만난 인연들이 가장 중요해, 엄마. 그 인연이 끊기는 게 난 제일 아쉬워.
M은 속마음 꾹꾹 누르고 조금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까, 엄마. 여행 못 간 거 너무 아쉽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