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의 종말 13화

L의 종말

7일간의 외출

by 이시절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L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L의 그다지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늘 '성공' 이었다.

성공을 위해서 공부했고 경쟁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성공을 위해서 한시도 쉴 틈 없이 공부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L에게는.


그래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밤을 새운 적은 없었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해서 저학년 동안은 하루 학원 2개를 다니며 국어, 수학, 영어, 과학, 미술을 배웠다. 방학에는 수영도 따로 배우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서는 학원이 늘었고 학원 숙제 탓에 새벽에 자는 일이 늘었다. 사립 중학교에 가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고 L에게 놀 시간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숙제, 마치면 학원, 집에 와서도 공부... 어쩌면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속 햄스터가 된 삶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공부하기 위해,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태어난 것 마냥 쉴 새 없이 달렸다. 오직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렸다. 마치 주인에게 뛰어가는 개처럼.


그렇게 결과적으로는 뭐, 성공했다고 보긴 아직 이르지만 좋은 고등학교에 가긴 했다.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법인지라, 실망할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부 잘한다고 인생이 성공하느냐? 물론 그건 아니다.


이렇게 갑자기 7일 뒤에 세상이 종말 한다면 공부한 사람이나 이미 성공한 사람이나 다 망한 거나 다름없다. 이때까지 쌓은 탑이 흔들린다고나 할까?

L은 허무맹랑한 말에 잠깐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속삭였다. 설마 세상이 망하겠어?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그런 말이야 몇 년 전에도 많았지. 백두산이 폭발한다나 뭐라나...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정리했는데 기사를 읽었는지 L의 엄마가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7일 뒤에 인류가 사라진다니 뭐라니? 그날이면 시험 있는 날 아냐?"

믿었던 엄마가. 엄마라면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종말이긴 한가보다, 싶었다.

뭐, 그렇다고 별 감흥은 없었다. 종말 해버리라지. 성공 못한 건 아쉽지만 어차피 언젠간 죽을 거였잖아?

뭐, 좀 시원섭섭한가.


죽기 전 못 해본 게 많은 건 사실이다. 성공? 그야 해보지 못한 건 맞지만 해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L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궤도 이탈' 이었다. 정말 길을 벗어난다는 뜻의 궤도 이탈.

누군가 정해준 성공을 향한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성공' 만인 삶이 아니라 '재미'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어쩌면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보았을 상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게 멋있어 보이는 시기도 있는 법이고.

그리고 특히나 궤도 속에서만 걸어온 L에게 궤도를 이탈한 길은 가장 탐나는 물건이었다. 궤도를 이탈할 수 있는 용기, 궤도 외에 다른 길들...


"엄마, 나 스카 가요!" (스카 : 스터디 카페의 줄임말)


어쩌면 기회는 이번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궤도를 이탈하기에 딱 적절한 시기였다. 궤도의 앞 길은 갈수록 희미해져갔고 궤도 속 길은 더 이상 좁게만 느껴졌으니까. 궤도 속에 있기에 L은 너무 커버렸다.


책가방도 없이 스터디 카페에 간다는 허무맹랑한 핑계와 함께 집에서 나와 아무 생각 없이 막연하게 걸었다. 궤도를 이탈해 본 적 없는 사람은 궤도를 이탈할 줄 모른다. 궤도에서 한 발자국 더 끝으로 갔다 한들 벗어났다기엔 역부족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학원 근처였고, 해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노을이었다. 하늘을 본 적이 거의 없었던가. 오늘 하늘은 유독 예뻤다. 오랜만에 봐서가 아니라, 그냥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예뻤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종말 전의 하늘이라기엔 너무 찬란했다.


별생각 없이 나와 걸었는데, 좀 춥고 배도 고팠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늦겨울의 서늘한 공기와 노을이 지는 황혼의 시간의 예쁜 하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뭐랄까... 오늘은 공부를 거의 안 해서 더더욱 그랬다. 공부를 안 하면 원래 기분이 좋아지나? 쓸데없는 생각에 묻혀 멍하니 길을 걸었다.

계속 걸었는데 똑같은 아는 곳만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새로움을 원했다. 발길이 끄는 곳으로 가니 아는 곳만 나왔다. 지루했다. 모든 게 평면적이게 보였다.


L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무언가 탁 트인 곳을 보고 싶었다. 바다, 바다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나와서인지 지갑을 들고 오지 못했다. 폰 케이스에 넣어둔 체크카드가 신의 한 수였다.

체크카드로 일회용 표를 사 지하철에 탔다. 사람이 하도 많아서 앉을 자리도 없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간신히 서있는 게 다행이었다. 대충 검색해 보고 바다가 있다는 곳에서 무작정 내렸다. 혼자 지하철을 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영 어색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왜 지금까지 탄 지하철이 어색했는지 떠올랐다. 늘 가지고 타던 책가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있었으면 책가방을 이리저리 부딪혔을 테고 어깨도 아팠을 텐데. 내려서 계단을 오를 때도 어깨가 놀라우리만치 가벼웠다.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샌가 버스가 도착해있었다. 버스에 타자 북적거렸던 지하철과 다르게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장 편안한 1인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랏빛과 핑크빛 노을이 예뻤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유독 시간이 빨리 가는지 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내릴 때가 되었다. 급하게 벨을 누르고 내린 뒤 지도를 보며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광활한 바다가 보였다. 거센 파도가 칠 때마다 하얀 거품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오늘따라 파도가 아주 셌다. 그 탓인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도망쳐 나왔지만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후련해지기는커녕 답답한 감정이 쌓여만 갔다. 이게 맞는 걸까.


모래알과 바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도 너무 평면적이게 느껴져서 꿈인가 싶었고 문제집을 풀고 있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너무 오래 그 궤도 속에 찌들어버렸나? 나오기엔 너무 늦은 게 분명했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몰랐지만 이미 부재중 전화가 꽤 쌓여있었다. 떠오른 김에 제대로 가출 느낌 나도록 폰 전원을 꺼버렸다. 전원이 꺼지고 나니 더 추워진 것 같았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마셨다. 종이컵의 반정도에 커피가 따라졌다.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감성적이었다.구겨진 종이컵과 희미한 입김, 여전히 거센 파도. 가출인지 도망인지 여행인지 뭣도 아닌 것은 감동도 없었다. 공부를 안 한다는 어색함과 외로움, 불편함, 늦겨울 밤바다의 추위만이 남아있었다. 희미한 감성이라고는 남색 빛 파도뿐이었다.


자판기 앞에 멍하니 서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차가운 폰 케이스가 만져졌다. 달은 구름에 가려 희미했다. 멀리서 경찰차의 푸른색과 붉은색의 조명이 보였다. 처음엔 희미하게 들리던 소리도 어느새 점점 가까워졌다. 경찰차는 L의 앞에서 멈췄다.

경찰차를 보고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궤도로 돌아갈 시간인가, 싶었다. 경찰차가 완전히 멈추자 L의 엄마가 내렸다.


"야! 미친놈아. 어디까지 간 거야?"


L의 엄마가 L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L은 멍한 눈빛으로 얌전히 경찰차에 올라탔다. 창 너머로 차갑고 강인한 바다만이 남아있었다.


"이년아, 가면 말하고 가야지. 스카는 뭐야? 스카가. 거짓말도 엉터리로 치고 있어."


L은 엄마의 말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뼈저리게 무언가 느꼈다. 너무 오래 한 궤도에서 살아와서 이런 소소한 이탈은 이탈도 아닌, 단순한 외출에 불과하다고.

keyword
이전 12화K의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