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간의 종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K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K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었다. 하루 세끼를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그런 아주 평범한. 하지만 단 며칠사이에 I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K는 2년짜리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2년은 길어 보이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중 1년은 병원에서, 1년은 평범하나 조금 특별하게 살았다. 아직 2년이 다 되지 않았으나 정확히 12일 뒤면 딱 2년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K는 자신이 12일을 더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병실에 누워 창밖만 바라보면서, 때로는 책을 읽으면서, 또 가끔은 그림을 그리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 K는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우울하게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시간들을 견뎌냈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창 밖의 나무들을 구경하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건 K의 삶의 이유가 될 정도로 충분했다.
K는 하루일과로 뉴스를 읽다가 종말 소식을 알게 되었다. K도 처음엔 굉장히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구나. 소설에서나 본 주제인데. 영화에서도 많이 봤고.
K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종말이 올 하늘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비록 좀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병원 탈출 장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지만. K는 차분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까지, 종말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마치 마지막 잎새처럼, K는 하루하루를 세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 일과로 달력에 체크 표시를 하며. I는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기적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엔, 종말을 보고 싶었다. 7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이번엔 볼 수 있지 않을까.
병원에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들, 아파서 보지 못했던 것들... 이번엔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일을 겪기 전의 K였다면 아마 K는 종말 자체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K는 소설에도, 영화에도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고 상상력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종말이 왔다는 뉴스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읽고서도 뭔 헛소리야? 라며 넘겼을 터였다.
K가 바뀐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거부했다. 뭐, 특별하게 살아간다는 표현도 웃기긴 하지만, 더 이상 모든 것에 무심하게 살지 않았고 필요한 일만 하는 것을 그만뒀다. 때로는 필요하지 않은 소소한 일도 하며 행복해했다. K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평범하지 않다고 여겼다. 매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상상하고. 전의 K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인이어삳. '특별한 삶'이란 과거의 삶과 달라진 삶을 칭하는 게 아닐까.
K에게 종말이란 조금 가까운 존재였다. 언제든 자신이 종말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탓이었을까? 좋아하는 소설 장르 탓일까? 어찌 되었든 K에게 종말은 저 멀리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언제든 다가오고 멀어질 수 있는 존재, 그 정도였다. K는 때론 종말을 상상하기도 했고, 종말을 읽기도 했고, 종말을 그리기도 했다. 모두 제각각인 종말들이었지만 다 썩 아름답진 않았다.
병원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마치 좀비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람이 저렇게나 때로 우르르 다닐 수가 있구나, 싶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탈출한 건 아니었다. 아주 아픈 사람, 포기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 그 외에는 대부분 나갔다. K가 보기엔 많은 의사, 간호사들도 나간 것 같았다. 솔직히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모두가 다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
하지만 모두가 떠난 건 아니었다. 짧은 단발의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고, 능숙하게 링거를 갈았다.
"선생님은 왜 안 가세요? 종말이라잖아요."
K가 조금 천진해 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어째서 떠나지 않는지.
떠나면 더 안 좋아져서 그러는 건 아닌지, 환자들이 걱정돼서 그러는지, 필요한 게 있어서 그러는지... 괜한 오지랖 같지만 조금은 그 간호사가 걱정되기도, 안타깝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환자분은 어떠세요? 나가고 싶지 않으세요?"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에 돌을 한 개 퐁당 빠뜨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질문에 I는 고민했다.
나가고 싶지 않아서 나가지 않는 것인지, 나갈 수 없는 것인지.
K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네요."
K의 대답에 간호사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적절한 대답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저도 그런 것 같네요."
이번에 호수는 돌이 던져지지 않은 고요하고 부드러운 호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최고의 위로는 공감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I는 오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옆 병실을 쓰던 환자가 나가며 K를 보고 물었다. 그는 K와 가끔 대화를 하던 사이였다.
"K 씨는 안 나가세요?"
이번에 K는 대답을 고민하지 않았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대한 고요한 느낌을 내기 위해 시도해 보며 답했다.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네요."
그는 다시 물었다.'왜'냐는 평범한 질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떤 욕망이 나가고 싶다는 마음보다 크길래요?"
K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탓에 이번에는 고요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종말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요. 나간다면 저는 보기 전에 종말 할 테니까."
K의 대답에 그는 살짝 웃었다.
"특이한 욕망이네요. 무섭지 않아요?"
"전혀요. 더 무서운 일도 많이 겪어봐서."
K는 아주 어릴 때 이미 용기와 무모함의 차이를 배웠다. 용기와 무모함은 현명한 자와 멋만을 추구하는 자의 차이 같았다. 용기는 도망칠 수 있는 것이었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모함은 숲 한가운데에서 아무 무기 없이 곰한테 덤비는 것이었고. K는 자신이 살면서 무모한 일을 단 한 번 밖에 (용기와 무모함의 차이를 알고 난 뒤의 기준으로)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성공률이 꽤나 낮았던 수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만약 성공했다면 그건 용기로 칭해질 것이었고 실패했다면 무모함이었다.
K는 언제든 죽기 전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지금 그중 해본 건 두 개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없었다. 미련은 인생에 방해일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K는 이제야 죽기 전 해보고 싶었던 것들은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하러 가면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믿던 K의 버킷리스트에 일단 국내는 없었고, 위험하지 않은 건 없었다.
K는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가 병원 안을 천천히 걸었다. 중간중간 마주친 사람들에게 소소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특별히 목적이 없는 듯 해보이는 산책이었으나 확실한 목적이 있는 산책이었다. K는 그를 찾고 있었다. 웬만한 건 다 해보았다는 그를.
그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늘 똑같은 곳에 있었으니까. 그의 병실, 혹은 정원 뒤편 벤치. 늦겨울이라 공기가 차가웠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 안녕하세요."
I의 조금은 고요한 목소리에 그가 뒤돌아보았다.
"아, K 씨. 무슨 일이세요? 안 가셨네요."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네요. 그게, 다름이 아니라."
대리경험. 마치 책을 읽으면 이미 절반은 해본 것 같은 그 느낌. I는 그걸 바랐다.
"혹시... 아이슬란드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이슬란드요? 갑자기?"
K에게 아이슬란드는 마치 천국 같은 곳이었다. 죽기 전 그곳에서 죽고 싶었다. 그곳에 해변가 앞에 집을 지어 살고 싶었다.
"네, 전 가본 적이 없어서요. 대리경험, 이랄까요?"
"대리경험이라... 재미있는 말이네요."
"아이슬란드,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이슬란드라면, 아주 잠깐 갔던 거 같아요. 며칠 안 있었죠."
K는 빙긋 웃었다.
"검은 모래 해변, 가보셨어요?"
K는 검은 모래해변을 좋아했다. 마치 죽음의 바닷가 같았다. 죽는다면 그곳에서 죽고 싶었다.
"검은 모래 해변은 마치 언제든 죽음이 덮칠 것 같은 곳이죠. 해가 쨍쨍할 때조차도."
K는 대리경험을 마치고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검은 모래 해변에서 죽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은 들었다.
K는 병실로 돌아와 노트북을 펼쳤다. 들어보고 싶었던 노래, 보고 싶었던 영화, 읽고 싶었던 책... 전부 다 듣고 보고 읽을 생각이었다.
K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부드럽고 잔잔한 음악부터 강렬한 음악까지 각색의 소리들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영화를 틀었을 땐 배우들의 목소리와 배경음악이 그 공간을 채웠고, 책을 읽을 땐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며 미묘한 소음들을 만들어냈다.
남은 며칠간 달력 속 동그라미와 엑스 표시는 점점 가까워졌다. 길고 긴 하루가 지나면 한 칸씩 가까워졌다. 비록 그 둘은 만나지 못하고 한 칸을 남겨놓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