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의 종말 11화

J의 종말

7일간의 작가

by 이시절

"솔직히 말하면, 내겐 얘기할만큼 흥미로운 게 없어"
여우가 말했어요.
"솔직한 건 늘 흥미진진해."
말이 말했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J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J는 작가였다.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으나 꾸준히 글을 썼다. 아는 사람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늘 글을 썼다. 읽어주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에세이는 쓰지 않았고 늘 소설만을 추구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에는 J는 너무 평범해 보였고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솔직한 건 늘 흥미진진하다는 는 말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만 단 한 번도 그 말에 동의한 적은 없었다.
J는 소설 속에 살았다. 어쩌다 보니 좋은 문장이 떠오르면 어디든 적으려고 했고, 좋은 문장을 보면 적어놓는 게 습관이 되었다. 모든 불행도 행운도 글의 양분이 되겠거니 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J의 인생에서 글이 빠진다면 남는 건 오로지 J의 신체뿐일 것 같았다. J의 영혼마저 글에 빠져있었다.

J는 예전 스스로 만든 픽션세계에서 살아갈 때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닌지 불안해했었다. 하지만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많은 작가들이 픽션세계에서부터 위안을 얻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상상도 두려운 상상도 기쁜 상상도 습관이 되어버려 늘 기대도 실망도 큰 J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었다.

종말의 소식을 알게 된 건 누군가의 에세이 때문이었다. 누군가 올린 짤막한 글 덕에 J는 종말을 알게 되었다. J는 전부터 종말을 상상하면 죽기 직전까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느낌과 생각 모조리 적어두고 싶다고. 마지막 순간 늘 상상에서 끝났던 모든 걸 적어버리겠다고.
작가가 아닌 지인들은 다른 사람이 읽지도 못할 걸 왜 적느냐고 했다. 하지만 J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 누군가에 자기 자신은 포함되지 않고.
글로 쓰지 않으면 생각을 정리할 수 없는 탓이기도 했다. 글로 줄줄이 적어버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습관 때문이었다. 글로 털어놓고 나면 머릿속이 편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J가 읽은 누군가의 에세이는 짧지만 간결하고 강렬했다. 몇 줄 안 되는 문장으로 심정부터 현실까지 모두 적혀있었다. J는 그 글과 그 글의 작가를 존경했다. 고작 그 몇 문장으로. 한순간 떠오른 문장으로 쓴 글일지라도 그 문장을 떠올린 것 자체가 존경스러웠다. J는 살면서 처음으로 에세이 작가를 꿈꿨다.

J의 인생은 순탄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힘들었고 어떨 때는 좋았기 때문에 몇 문장으로 정리하긴 어려웠다. 마치 작은 언덕이 잔뜩 있는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힘겹게 위로 올라갈 땐 힘들고, 정상에서 잠깐 좋았다가, 내려갈 때 다시 힘들고 평지에선 다시 좋았다가... 햄스터 쳇바퀴 마냥 뱅뱅 돌았다.
J는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에세이로 자신의 인생을 써야 한다면 사전 한 권은 나올 것 같았다. 종말에 대해 써도 책 한 권은 나올 것이고. 하지만 그 에세이를 읽은 순간 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간결하고 핵심만 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이제껏 J는 짧은 글보다는 긴 글을 선호해 늘 세세한 것까지 묘사하며 긴 글을 써왔다. 하지만 확실히 글이란 늘 배워온 것처럼 구구절절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J는 컴퓨터가 아닌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럴 땐 레트로 감성이지, 싶은 심정으로 방에 들어가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다. 조명은 딱 하나만 켜놓고 옆에는 느낌 있게 에스프레소와 책 몇 권을 쌓아놓았다. J는 완벽하게 느낌 있는 환경에 있는 걸 좋아했다. 최근 주문한 빈티지 장식용 전화기는 언제 도착할지 의문이었지만 종말 전에 도착하길 바랐다.

잉크를 채우고 처음엔 부드럽게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다른 종이에 몇 번 선을 그었다. 장식용으로 산 만년필이었는데 의외로 필기감이 좋아 많이 썼다. 주로 종이에 초안을 작성하고 글로 옮기는 타입이라 펜과 애용했다. 취미가 어쩌다 보니 노트와 펜 사기가 되었다. 가끔 가는 문구점, 예쁜 노트가 있으면 언젠간 쓰겠지, 싶은 마음으로 샀고 집에는 이미 노트가 꽤 많이 있었다.

걱정과 달리 만년필은 아주 부드럽게 나왔다. 문구점에서 싸게 주고 산 만년필인데 나름 성능이 만족스러웠다. 만년필의 잉크가 까맣게 종이에 선을 그었고, 그 선을 노트로 이어가 그다지 예쁘지 않은 글씨체로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적어나갔다.

아무 일도 없이 문장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걸 해냈기에, 해내야 하기에, 해낼 것이기에 그가 작가인 것이겠지만, 그래도 아직 J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J는 한껏 갈겨쓴 종이를 넘기고, 잠깐 망설이다 첫 문장을 적었다.
'종말이 왔다.'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평범하고, 잔잔하고, 지루했다. 아주 진부한 옛날고전소설처럼, 읽기 싫고 공감도 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J는 선을 죽죽 그어버리고 다시 문장을 적었다.
'마지막 글이기에 새로움과 완벽을 원했다.'
그러다 문득 고민했다. 과거시제로 쓰는 것이 옳은가? 현재에 하는 생각이니 현재가 맞는 건가? 고민하다가 결국 J는 문장을 현재형으로 바꿨다.
'마지막 글이기에 새로움과 완벽을 원한다.'
'늘 새로움을 추구해 온 것은 맞지만, 이번은 더욱 새로운 것을 원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익숙할 지어라도 내게는 아주 새로운, 그런 것...'
마침표를 찍고 망설이다 결국 J는 종이를 찢어버렸다. 아주아주 지루한 문장들이었다. 살아있지 않은 평면적인 물고기 같았다. 마치 한때 그가 슬럼프를 (이 표현이 옳은지 의문이다.) 겪었을 때 느낀 것과 같았다. 모든 글이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기간이 아주 짧았지만.

노트를 책상 구석으로 몰아두고 바퀴 달린 의자를 이용해 한번에 뒤로 간 뒤 (감성적인 걸 좋아한다고 했지 사람이 감성적인 건 아니다.) 책장에 책 제목을 대충 훑고, 책 한 권을 꺼내와 주르륵 훑었다. 아주 예전에 산 책이었다. 기억이 조금 흐릿하게 나는. 아마,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되는 책이었지.
J는 의자에서 끽끽 소리가 나게 몸을 뒤로 기울이며 책을 중간쯤 펼쳤다. 힐끗 봐도 보이는 작가의 필체와 알 수 없이 편안함과 교훈을 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종이를 팔락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다가, 문득 의자가 끼익 하고 다시 원래대로 세워지는 소리가 났다.
'솔직한 건 늘 흥미진진해.'
J의 손이 멈췄던 페이지에 적힌 문구는 아주 강렬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겐 얘기할 만큼 흥미로운 게 없어"
여우가 말했어요.
"솔직한 건 늘 흥미진진해"
말이 말했습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중에서

솔직함? 솔직함이란 어떤 걸까. 그는 살면서 진심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었다.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뿐 이미 있는 것을 다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에세이란 가장 큰 새로움이었다. 가장 큰 솔직함이었고.
하지만 J는 아직 그 문장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과연 정말 아무런 꾸밈없는 솔직함도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과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솔직함도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의문 속에서 J는 다시 펜을 들었다. 잔뜩 멋들어진 만녀필이 아닌 천 원짜리 삼색볼펜이었다. 만년필보다 부드럽고 깔끔한 필기감. 굳이 따지자면 삼색볼펜이 만년필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좋긴 했다.
삼색볼펜을 빙빙 돌리며 느낌에 집착하는 걸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로 살아온 J였기에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인테리어부터 옷, 가구, 노트, 펜, 식기 하나까지 모두 개인적인 취향, J가 추구하는 멋의 관점에 맞춰진 것들 뿐이었다.
돌리던 삼색볼펜이 데구루루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기보다는 스치고 지나가기에 가깝게 떨어진 삼색볼펜은 지긋지긋하게 책장 밑으로 들어갔다. 꺼내기 귀찮았고, 꺼낼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기에 결국 J는 신의 뜻이겠거니, 하고 만년필을 들었다.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살짝 흔들어본 뒤에 선을 몇 번 그었다. 확실히 삼색볼펜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말 그대로 고급진 느낌.

부드럽게 휘어지는 선들이 마치 그림을 그리는 건지 글을 쓰는 건지 헷갈렸다. 글이나 그림이나 표현하는 건 똑같으니 뭐, 별반 다를 건 없나.

J의 손에서 왕왕 맴돌던 문장들은 수많은 시도 끝에 몇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그 길게만 느껴지던 인생이 몇 문장으로 정리되었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허무하고도 후련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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