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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Jul 01. 2022

[영화]순전히 나만 보기 위한 떫평: <화이트 타이거>

떫평_

빈부격차가 버젓이 드러나는 인도의 문화적인 면을 아주 직접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카메라의 움직임, 연출 또한 주인공인 발람의 시점에서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발람의 감정 변화가 일어나는 표정연기도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포커스를 맞추는 등, 부각시키고 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자신이 발람이 된 듯 그의 인생에 집중하게 된다. 발람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도는 더 없이 처참했다. 인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가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할머니에 의해 돈을 벌기 위한 도구마냥 희생된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장학금을 받으며 일명 ‘화이트 타이거’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또 돈 문제로 그 기회마저 잃고, 나중의 아쇽이 말하듯 ‘설익은’ 인간으로 되어버린다.

영화 보는 내내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발람이 아쇽에게 너무도 충실한 하인 역할을 하는 것.

처음엔 그저 좋은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욕망 때문에 그렇게까지 빌빌 굴어대나 보다 했지만 끝까지 그에게 다정하며 용모단정도 다시금 바꾸고 하는 걸 보아 그저 그의 충직한 하인으로 남고 싶었구나 했다. 아쇽의 와이프 핑키는 뉴욕에서 지내온 기억으로 인도의 하인 제도에 계속 발발하는 모습을 보이며 갈등을 일으키곤 했는데, 대체 발람의 입장에선 그녀가 어떻게 보였을 지가 의문이었다. 그저 과한 우대로 느껴졌을까? 아쇽은 자신의 가족보다 훨씬 더 발람에게 잘 대해주었다.

높임말을 쓰며, 걱정해주고, 핑키가 떠났을 때는 친구처럼 지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자’에게만 주어지는 여유와 배려 일뿐이었고, 결국 자신에게 부모님 같던 존재인 주인은 저를 한낮 노동자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발람이 살아온 사상과 집념을 버리고 탈바꿈하는 데는 꽤 빨랐다. 그럴 만한 것이 이미 그에게 비춰진 세상이 너무도 비관적이었기에.

나는 심지어 그가 깨진 술병을 무기로 쓰려 계획할 때 ‘죽일 때 겨우 저걸로 되겠나...’ 라는 걱정만 들었다. 그래봤자 인간은 돌로 툭 쳐도 피를 흘리며 한 순간에 죽을 만큼 나약한 인간이었으니, 굳은 결심을 하고 손에 칼을 쥔 누군가에겐 당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쇽이 언젠가 한 번 내 이름을 써도 좋아요, 라고 대사를 쳤을 때,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가 아쇽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그의 이름으로 새 삶을 살아갈 결말이란 것을. 결말의 연출은 발람을 포함한 그의 직원들이 카메라를 향해 단체로 응시하면서 끝이 난다. 모든 것은 관객들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그들이 던진 말과 보여준 모습이 진정한 성공일까? 그렇다면 인도의 하층민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인과 도둑질,

즉 범죄밖에 답이 없는 걸까? 무엇이 그 순수한 사람들을 틀에 박힌 사상으로 키워냈으며, 결국 어둠의 길로 빠지게 만드는 걸까. 답은 뻔하지만 국가, 그 자체였다. 그들이 주입식으로 어릴 적부터 배워오던 사회운동가조차도 부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있었던 현실이다. 사실 우리나라라고 해서 별반 다를 건 없지만, 인도는 압도적인 수의 하층민들이 너무도 버젓이 드러나는, 어찌보면 부자들에게 있어서 우스운 사회 풍경이다. 그 안에서 아쇽같은 마인드를 가진 인물들이 드물 테지만 결국 그도 그 제도에 무릎을 꿇고는 뇌물을 갖다 바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자로 끝나버린다. 발람은 스토리상으로는 궁극적인 목표인 ‘신분상승’에 성공했다. 자신을 얽매이는 가족으로부터도 벗어났다. 시골쥐라 불리던 생활에서 사장님이 되었다. 어쩌면 인도 뿐만이 아닌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 신분 상승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은 작품을 통해 무얼 드러내고자 한 것일까. 과연 범죄를 저질러서까지 가난에서 탈출하는 발람의 방법이 인도에서는 정당화 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세계 민주주의 국가는 어떤 나라인 걸까. 하층민으로서 태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운명을 다른 운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방안 중에 도덕적인 방안은 없는 것일까. 그런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감독은 발람의 인생을 보여준 것일까?

나는 무엇보다 한창 갈등의 최고조에 다다랐던 발람의 장면이 인상 깊게 자리 잡았다. 우러러 보며 층수를 세곤 하던 그 건물 아래에서, 그는 처음으로 신발을 벗어던지는 등 화를 내뿜다 갈대밭에 몸을 수그리곤 괴로워한다. 마치 흔들리는 갈대처럼 방황하기 시작하는 그. 평상시 발람의 감정 변화에선 그의 얼굴에 주목을 했지만, 그 장면만은 전지적 시점으로 그의 모습만 롱샷으로 잡아준다. 정의를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도 하찮다 생각한 무리들과는 어울리지도 않다가, 다시 그들에게 다가가며 조금씩 일탈도 한다. 화이트 타이거의 결말까지 보면 우리는 어딘가 묘한 기운에 빠져든다. 그가 살인을 저지를 때까지는 뭐...저렇게까지? 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의 성공한 모습을 보다보면 전혀 이질감을 느끼고 그러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도 어찌 보면 같은 입장이니 발람의 행동이 옳다고 볼 수도 있었던 듯하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사회는 그 이름 뒤에 발람과 같은 수많은, 순수하게 자란 사람들을 하나의 닭장에 가둬놓고 그들이 성공하는 것조차 타락이라고 칭한다. 발람의 인생이 화이트 타이거로 표현되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 아니면 그 ‘백호’라는 운명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이따금 우리가 기득권층들의 삶을 엿보고는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칭하며 평등을 논하다 신분 상승이 되는 순간 자유를 논하게 되는 모습처럼, 세상을 살아가며 꼭 마주하게 되는 사회 안에서의 내 정체성을 떠올리게끔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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