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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문제일까, 마음이 문제일까.

by 나나키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서울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큰 이모가 있던 강원도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당연히 전학도 가게 됐다. 전학을 가게 된 곳은 여자 중학교였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전학 오는 사례가 흔치 않았는지 등교 첫날에 좀 논다는 무리들부터 모든 학생들이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나를 보러 왔다.

멋이고 뭐고 부릴 줄 모르던 나는 그들의 상상 속 서울이미지와 동떨어졌을 테고 관심은 하루 만에 바로 사라졌다.


반짝 꺼진 관심이 거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무슨 의도였는지 전학을 가자마자 바로 반장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학업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았던 분위기였던 학교라 골탕 좀 먹어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엉겁결에 반장이 되고 또 다른 아담한 체형의 학생이 부반장이 되었다. 20년 넘도록 연을 잇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다.


부반장과 반장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학교 교실 꾸미기였다.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일로 기억한다.

도망치듯 내려온 강원도에서 당장 생계를 어떻게 꾸릴지 막막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부반장의 부모님의 스펙은 어마무시했다.

아버님은 교수, 어머님은 지역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입시학원장이었다. 부반장 친구의 어머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얜 뭔데 반장이 되어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얘네 엄마는 뭐 하는 거지? 눈빛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 물으셨다. 엄마는 반장 된 거 알고는 계시냐고.

그때부터 이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급을 나눴다. 너는 잘 사는 친구. 나는 못 사는 애. 너는 유복한 아이, 나는 가난한 아이.

그렇게 일 년을 간당하게 보내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됐다. 여전히 우리 집과 나는 가난에 찐뜩하게 붙어있었다.

매번 모의고사를 보는 날에 이 친구는 그 당시 내가 엄두도 못 낼 피자떡볶이(그땐 정말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던 음식이었다)와 비빔만두, 우동까지 시켜주며 내게 공부하라며 학교 생활을 하도록 붙잡았다. 대학별 전형이 담긴 커다란 종이를 식탁에 펼쳐두고 여기는 어떠냐고 묻던 친구에게 떡볶이가 고마워 말하지 않았지만 되묻고 싶었다.

너는 밀어줄 부모가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그 친구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뭔지 모를 불쾌한 감정이 떡볶이를 뿌리치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끝까지 가지 않으려 했던 대학에 어찌어찌 들어갔고, 친구는 재수를 하게 됐다. 어쩌다 또 연락이 닿아 듣게 된 친구의 고민이 새삼 가소로웠다. 부모님께 죄송하다, 다음번 임용은 붙을 수 있을지 막막하고 괴롭다는 이야기. 나는 당장 밥값이 없다. 굳이 오게 된 대학 명목으로 빌린 대출도 아빠한테 다 들어가서 돌아버리겠다. 친구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내 이야기를 뉴스기사처럼 보는 꼴이 상상됐으니까.

꼬여버린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친구도 직업의 고충이 있었을 테고, 어느 집과 마찬가지로 부모님과의 마찰도 있었을 것이다. 친구의 고민이야기가 왜 그토록 가소로웠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지금도 그 친구의 고충이 가소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30평 넘는 신축아파트 대출 없는 자가, 교사남편, 심지어 남편 이름으로 된 집도 있고, 본인도 부모님도 노후걱정 없는 삶, 세상 귀여운 딸, 최근에 새로 뽑은 신형외제차까지. 그 친구가 대체 뭐가 그렇게 고충이 있을까 싶다.





가난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 타인의 삶에 무지해지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자기만의 지옥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지옥이 가장 구질구질하고 괴롭다. 친구도 당연히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감 뒤에 숨겨진 고된 과정이 얼마나 많았겠나. 가진 게 많은 친구일지라도 나름의 고충들로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을 테지만 부끄럽게도 친구의 고민이 아직도 나는 가소롭다. 결혼까지 했는데 여전히 임대아파트에 사는 나, 확 트인 통창뷰가 갖춰진 중심지 신축아파트에 사는 친구. 여전히 급을 나누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친구, 돌아갈 직장이 있는 친구. 매일 같이 일하는 나, 쉬게 되면 생계가 끊기는 나. 투잡러로 살아도 걔 월급만큼은 내가 벌고 있는 걸까. 아… 나이를 먹고도 나는 왜 이렇게 찌질한 걸까.



가난에 찌든 마음은 여전히 이런 무거운 글을 남기게 한다. 내 마음이 문제라는 것도 안다. 신축아파트, 신형외제차, 돌아갈 곳이 있는 직장을 갖게 되면 그땐 친구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게 될까?

부쩍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의 삶도 궁금해지지 않는다. 20년이란 시간, 그에 걸맞지 않은 얄팍한 마음. 이렇게 연락이 소원해지다 단절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피자떡볶이를 사주던 친구의 마음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열등감 덩어리는 언제쯤 사라질까. 연락할 의지도 없는 나는 이젠 더 이상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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