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가난’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제목부터 아리다. 덧붙인 말은 더 아리다. ’ 일인칭 가난, 그러나 일 인분이 아닌. 어릴 때부터 지독히 앓던 가난에 대한 기록이 나의 쓰린 기억까지 끄집어 올려 읽다가 몇 번을 멈췄다. 집안이 가난하다는 걸 증명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시간, 무심과 무시를 오가던 어른들의 눈빛…
작가의 삶은 지금 어떤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도 가난의 흔적은 아직 여러 곳에 묻어있지 싶었다. 보이던, 보이지 않던.
이제는 어딘가에 돈이 없다고 증명하지 않고도 스스로 밥을 사 먹을 수 있다. 밥뿐이랴, 나새키 고생했다고 꼬까옷 사줄 여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자를 꿈꾼다. 어릴 때의 내가 바라던 부자의 모습을 이미 나는 갖췄는데. 밥값, 차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또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감사함을 잃은 걸까. 나와 남편이 임대 기간 없이 살 집, 나와 나의 부모의 노후라는 또 다른 넘어야 할 문턱이 보인다. 그걸 넘으면 이제 나도 진짜 부자겠지.
그 문턱을 넘기 위해 투잡을 뛴다. 오전 커피 수업이 끝나고 교습소 수업을 하러 가기 전, 근처에 앉아 김밥을 우걱우걱 밀어 넣고 있는데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나가는 무리들의 대화가 들린다. 이사 간 집의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보통 직장인이 나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으니 어떤 친목무리였는가 보다. 커피, 어디로 갈래? 물으며 지나가는 그들의 옷차림과 향기가 스쳐 지나간다. 예쁘고, 좋았다. 시원하면서 꽃향이 났다. 한 사람이 차로 향하고 운전대로 향했다. 몇은 따라 탔고, 몇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오우, 딱 봐도 비싼 차.
그들의 속사정을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그들은 내 눈에 부자였다. 인위적이지 않은 듯한 좋은 향, 깔끔한 옷차림, 비싼 차, 커피를 마시러 간다는 대화. 좋겠다… 나도 이제는 제법 살만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차림을 갖추고 저들이 끄는 차에 올라타는 상상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휴, 나도 참… 아직 멀었구나. 아직도 저런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다니. 저들도 오늘 휴가일 수도 있는 거지, 빨리 가자. 마음가짐과 달리 일어나는 몸은 무거웠다.
‘부자가 될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부반장의 부모님 재력을 부러워하던 중학생의 나, 한창 꾸미고 활기차던 또래들을 부러워하던 대학생의 나, 취집 하던 친구를 부러워하던 유부녀의 나,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나… 이쯤 되면 내가 문제인 것 같다. 나이와 삶의 형태가 달라졌는데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는 나의 모습. 내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의 삶에 더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 나. 옳지 못하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것을 부쩍 더워지는 여름에 지친 탓으로 돌려보려 해도 안다. 내 마음의 가난이 문제라는 것을.
그래서 궁금하다. 정말로 대출 없는 자가에, 나와 나의 부모님 노후까지 거뜬히 책임질 수 있는 정도를 벌고 나면 이 찌질함이 사라질까. 내가 생각한 부의 기준을 갖추면 이제 주눅 든 나는 없어지는 걸까.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노동으로 먼저 경험과 종잣돈을 쌓고, 돈을 불리라는 자기 계발서의 공통된 말들에 나는 속고 있는 걸까? 왜 나는 계속 노동만 하고 있는 거 같지? 나랑 나이차도 얼마 나보이지 않던 그 무리들을 보며 의심은 커진다.
중학생의 나, 대학생의 나, 유부녀가 된 나, 40대를 향해가는 나. 나이 곱게, 품위 있게 들어가 보자던 다짐은 어디 갔나. 한창 주눅 든 어깨로 김밥을 마저 욱여넣고 일어난다. 차비 걱정하던 그 시절의 내가 다시 버스에 올라탄다. 알바를 하러 버스에 올라탔듯 일터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다. 그들은 커피를 어디로 마시러 갔을까. 같은 시간,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 생각은 딱 버스에 내리기 전까지만 하자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부자는 정말 누가 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