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꼬마 도둑

소멸시대 지역경찰 - 7화

by 푸르름

처음 이 동네에 포도가 유명하다고 하였을 때, 만나는 노인들의 태반이 포도농사를 짓는 다고 말하였을 떄 나는 늘 상상해왔다. 이 동네 가득 포도 먹기 전 입안 가득 퍼지던 달큰한 향이 코끝을 간질일 거라고. 마치 입안에 넣지 않아도 향으로 먼저 배부를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여름이 지나도록 동네 어디를 순찰을 나가든 포도밭은 탄산 빠진 사이다마냥 밍밍했다.

향기는커녕 풀냄새가 먼저였고, 이슬이 맺힌 봉지들이 수줍은 아이처럼 숨어들어 냄새를 감추고 있었다.


“포도 농사를 이렇게 크게 지으시는데 냄새가 하나도 나질 않네요”

“신기하쟤? 원래 포도는 속이야 달지 겉은 말이 읎어”

퇴근길에 걸핏하면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서 자던 박 씨 할아버지의 포도 창고에서 포도 두 상자를 사던 날. 초저녁부터 취한듯한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씩 웃으시며 답했다.


포도는 그렇게 말이 없이 조용한 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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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온 동네가 포도를 수확하거나 팔거나 하는 자줏빛 포도가 검붉게 익어가는 8월 중순. 조용하던 파출소에 “포도밭에 도둑이 들었다”라며 화가 잔뜩 난 신고 한 통이 들어왔다. 두릅이나 고구마, 고추 등을 훔쳐 가는 신고는 종종 있었지만, 포도 도둑은 처음이었기에 의아함을 뒤로한 채 출동하였다.

“무서워서 가보지를 못하겠어. 아주 작정을 하고 훔쳐 간 거 같다니까!!”

순찰차가 도착하자 할머니 한 분이 뛰쳐나오더니 묻기도 전에 포도를 감싼 봉지를 잔뜩 들고 와 하소연했다. 대낮이기도 하거니와 시골길이라 차가 다닐 도로도 한 개뿐이라 미심쩍은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박 씨 할머니를 겨우 진정 시킨 채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니 이게 웬걸.


실제로 누가 포도나무를 털러 온 듯 저 멀리까지 지그재그로 찢겨 나간 포도 봉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만 도둑의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것이 나무마다 포도 봉지가 한두 송이만 뜯겨 있었고 그마저도 포도를 따가기보단 맨 아랫부분 가지들만 부러트린 듯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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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 뭐냐 이것들 모두 가져가 과학 그거 해주쇼. 우리는 포도 농사하며 입에도 대지를 않아!! 한. 두 개 먹은 거면 몰라 이래놓으면 나무들이 자신을 스스로 치료하느라 포도가 익지를 못한다니까! 아주 못돼먹은 놈이야!!”

주변을 같이 다니던 할머니는 나무 밑에 떨어진 포도 껍질 몇 개를 들더니 우리에게 들이밀며 소리쳤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포도 껍질을 죄다 주워 과학수사반에 감식을 보내 달라니. 과학수사라는 말에 직업병처럼 수사 과정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 수많은 포도 껍질을 수거해서 아주 작은 DNA 하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손이 필요할 것인가.


해당 포도 껍질이 떨어져 있다 해서 범인이 먹은 건지 제삼자가 먹은 건지 알 수도 없거니와 이건 절도가 아니라 손괴라고 정정해드리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 해 동안 포도만 기르는 농사꾼들 앞에서 맞고 틀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알겠다고 하고는 감식반을 부르겠다고 하였다.


2시간 거리에 있는 감식반이 오기 전에 우리는 할머니와 모든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봉지가 떨어진 주변 포도 껍질을 주웠다. 말이야 쉽지 그 더운 날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껍질로 보이는 걸 비닐장갑을 낀 채 일일이 주우려 하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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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도둑 내가 잡고 만다라는 생각에 껍질로 보이는 걸 주운 지 30여 분이 지났을까. 할머니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셔츠가 모두 다 젖어갈 즈음. 옆집에서 다른 손자를 데리고 온 다른 할머니가 박 씨 할머니를 찾아 소리쳤다.


“박씨 박씨 있는교. 내가 진짜 창피해스리”

할머니는 한참을 소리치다 박 씨 할머니를 보고는 연신 손자를 앞에 세우더니 손짓을 하였다.

“이놈이 나가서 놀라고 했더니만 포도자국으로 얼굴이 난장판이 된 거 아니야 어디 가서 그랬냐니까 박 씨네 하우스지 뭐야 어휴 미안해. 빨리 죄송하다고 해야지 이놈아 경찰 아저씨도 너 잡으러 왔나 보다.”

입 주변에 보라 댕댕하게 물든 꼬마는 경찰들을 보고 놀란 듯 겁에 질린 채 박 씨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안산댁 손자가 한짓이가?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공짜로 한 상자를 줄 텐데”

범인을 알고 보니 현장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 키가 작은 꼬마는 자기 손에 닿는 작은 나무들만 골라서 점프를 하며 티 나지 않게 포도를 한 알씩을 따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온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찢어진 포장지를 통해 팔이 닿는 포도알만을 골라 따먹은 것이다. 포도나무가 작기에 가능했던 촌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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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게 한 포도밭 도둑이 10살이 채 안 된 꼬맹이라니.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화가 잔뜩 나았던 박 씨 할머니도 한참을 옆집 할머니와 대화하고는 겸연쩍은 듯 우리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였다.


“이를 어째. 바쁘신 분들 데리고 내가 괜한 짓을 했네. 애가 그런 거니까 좀 이해해줘”

“아이고. 됐어요. 포장지가 뜯긴 건 할머님이신데 뭔 사과를 하세요. 얘기가 한계 아니었으면 괘씸한 도둑이긴 해서 우리도 꼭 잡으려 했어요”


범인이 바로 잡힌 것에 안도하면서 우리는 꼬마에게도 포도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먹어야 해라고 한 뒤 순찰차로 돌아왔다. 박 씨 할머니는 떠나려는 우리에게 헐레벌떡 다가와서는 포도송이를 한 아름 담아와 순찰차 안으로 쏟아 넣으려 했다.


“이거 맛이나 좀 봐. 하얀 게 올라온 거라 다 익은 거니까.”

“아이고 이런 거 받으면 안 되어요. 우린 괜찮으니까 나중에 도둑 오면 얼마든지 신고해주세요”

한사코 막아서는 우리에게 시식도 모르냐며 정 없다고 성질까지 내던 할머니는 게 중에서 포장지가 뜯긴 몇 놈들을 기어코 순찰차 안으로 욱여넣었다.


“이건 어차피 팔지도 못한다. 아까 그 애가 포장지 찢어놓은 거라 그냥 버리는 거니까 맛보고 나중에 언제든지 와서 달래 해라”

애초에 받고 말걸. 순찰차 안에는 포도알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애초에 무엇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겁내기에 나는 억지로 할머니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여주었다.


30분간 땀을 뻘뻘 흘린 데다 생돈까지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 입이 댓 발 나온 나를 위로해주시려 했는지 팀장님이 포도 한 알을 건넸다.

쓴웃음을 지으며 포도는 입에 넣자 껍질 안에서 진득한 단물이 터져 나왔다. 땀을 흘리는 내내 짜증 나 맡지못하던 아무 말이 없던 포도 향이 그제야 입안 가득 몰아치자 팀장님과 오늘의 촌극을 이야기하며 크게 웃었다.


어쩌면 조용한 포도가 무더운 여름 심심한 탓에 아이와 함께 한바탕 시끄럽게 놀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소소한 일을 해결할 수 있기에 지역 경찰이 보람찬 일인인지도 모르겠다. 조용한 포도 덕에 보낸 시끄러운 하루였다.



Tip

- 대부분에 길거리 전봇대에는 국가나 시에서 운영하는 방범용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실제 절도 및 교통 사건·사고 발생 시 112에 신고하여 간접 열람하거나, 정보공개 포털(open.go.kr)을 이용해 직접 열람할 수 있다. 다만 포털은 매우 오래 걸리니 112에 도움을 구하자.

- 흔히 먹는 켐벨 포도는 9월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포도를 고를때에는 하얀가루(과분)이 묻어 있고, 붉은색보다는 색이 진한 검은 색 빛을 띄는 것을 고르면 달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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