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태어나거든

반려견과 나

by 푸르름


'요'
아버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반려견이다. 요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 주인공.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는 부모님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아버지께 요는 친구요 형제였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 조금 색다른 것이 생기면 아끼고 꼈다가 요와 나누어 먹고, 때로는 요 집에 들어가서 함께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요 얘기는 다 외울 정도로 들었다. 요의 새끼가 죽었을 때, 사체를 놓지 않아 떼어내기 얼마나 여려웠는지와 새끼가 떠난 자리에 몇 날 며칠을 고개를 묻고 냄새를 맡았는지 등 아버지는 마치 내가 요를 키웠는지 착각할 정도로 상세하고 슬프게 묘사하였다. 자식을 잃은 상처가 끝내 마음을 갉아먹어였을까. 요는 어이없게도 몇 년을 건너왔던 집 옆 길가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요의 어이없는 죽음은 아버지의 유년시절을 넘어 나의 유년시절까지 애타게 만들었다. 더 이상 다른 개를 키우고 싶지 않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반려견을 키우자 마음먹었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반대로 어머니가 어릴 적 개에게 물린 트라우마로 개에 극도의 공포의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는 반려견에 대한 마음을 접었고, 나 역시 전해 듣기만 하고 직접 반려견을 키울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반려견에 대한 우리 집의 역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아버지께서 요의 그리움으로 엄마 몰래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개를 보자마자 토실토실한 털에 토실이라 불렀다. 아버지 친구 분께서 준 것으로 처음에는 다리를 못 쓰는 줄 모르고 갖고 왔는데 태어날 때부터 기형이라 버림받은 아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오기 전에 베란다에 잘 숨겨 놓았다. 그러나 작은 아파트에 온 털 때문에 퇴근해서 돌아온 어머니는 오자마자 재채기에 콧물을 쏟아내셨다. 그 길로 토실이는 아버지의 가게로 갔지만 손님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고민 끝에 교회 분 시골집으로 당분간 보내기로 하였다.
처음 생긴 반려견에 울고불고 떼를 써보았지만 이미 어느 곳도 토실이가 지낼 곳은 없었다. 그때 분명히 약속하였다. 절대로 토실이를 시골 어르신들의 국거리로 만들지는 아니하겠다고. 분명 나보다 더 힘들었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토실이를 트럭에 태워 보냈다. 그 이후 가끔 시골집으로 가서 토실이가 커가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위로를 받고는 하였다. 아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렸지만 자주 가 볼 수 없는 거리라 간간이 소식만 들었다.

내 생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생긴 것은 토실이가 시골로 간 지 3년 뒤. 마음속에 남아있는 생각들이 기가 막히게 현실로 나타나 듯 불행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나치게 짜증 나도록 더웠던 여름. 친가 가족 전부가 모여 시골에서 보내온 국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무슨 국이냐 물었더니 어느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국 없이 밥을 드시지 않던 아버지가 그 날 따라 국에 숟가락도 대지 않는 것을 보며,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울분을 토하며 설마 토실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그렇게 음식을 혐오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정말 그 이후로는 그 국을 파는 곳을 지나기도 어려웠다. 동물 애호가들이 우리나라에 혐오 시위를 하고 야만족이라 할 때도 콧방귀를 쳐왔는데.......
나의 초등학교 때의 충격적인 일은 그 후로도 우리 가족을 괴롭혔고 흔하게 마주치는 강아지를 볼 때마다 복슬복슬 한 꼬리를 있는 힘껏 흔들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나의 이야기다.

작년에는 1년에 집에 내려간 횟수가 3번이나 될까? 내 자신의 초라함도 있겠지만 갔다 와서의 육체적 어려움과 여태 떨어져 지내 온 어색함이 더 컸다. 더군다나 공부를 시작하며 몸과 마음이 지치자, 가족 사이에서 분위기를 띄우던 청춘을 잊은 지도 오래.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틈 속에서 점점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초라함과 어색함을 이기는 사건이 생겼다.

나는 올해는 집에 매주 내려간다. 육체적 정신적 불편을 딛고, 세상 행복한 얼굴로 부모님 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새로운 가족 '복실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로 할머니 집을 짓게 되자, 직접 키울 수 있겠다 생각한 아버지는 거진 20년이 자나서야 반려견부터 데려왔다. 이 복실이는 대구에서 무려 6시간을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다. 종은 아키타. 볼 때마다 반가움에 올라타고 꼬리를 흔들고 그것도 부족하면 혀로 내 얼굴을 구석구석 핥아주었다. 집에서 오는 전화도 잘 받지 않던 내 폰은 어느새 월요일부터 주말 버스표를 예매하였다. 복실이는 부모님의 일상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워낙 말을 잘 알아듣고 신기하게도 짖지를 않자, 처음에 반대하던 어머니도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주말 전부를 함께 보내고 있다. 부모님의 산책도, 장보기도 복실이를 위한 시간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사진을 올리던 우리 집 단톡 방에도 가족의 여행지 일상이 아닌, 복실이의 영상과 사진이 대부분이 되었다.


특히나 다투듯 복실이에게 정을 주는 이유는 변하지 않음이다. 시간이 지나면 영원한 관계가 없듯, 친했던 친구들도 점점 멀어져 가는 20대의 끄트머리에서 복실이는 한결같이 나를 반가워해 주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반가움이 커지며 일주일만 지나도 반가움이 주체를 못 해 실례까지 하는 복실이를 보며 비관적이던 인간관계에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복실이가 온 지 10개월. 초라함과 미래에 대한 걱정에 가족마저 어색하던 나의 20대는 어느새. 다음 주는 뭐하며 놀까?라는 설렘에 하루하루가 행복하게 되었다.

요즘도 아버지는 과거 '요'와 토실이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며 잠시도 떨어지지를 않으신다. 그러나 오히려 다시 태어난 것은 복실이가 아닌 우리 가족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복실이의 끝은 요와 토실이와 달리 또 다른 '태어남'으로써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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