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스러운 곰 Apr 09. 2019

작품이 원작과 만나는 시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君の膵臓をたべたい)



한 번씩 일본 영화를 보다보면 그 특유의 몽환적인 감성을 느낍니다.


뭔가 현실에서 붕떠있고 낙천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선지 완결성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의 원작을 읽어볼 것을 추천드립니다. 못다한 깊고 애틋한 얘기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단지 영화만 보시면 이것이 일본 감성의 청춘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제가 소설을 보면서 놀랐던 건 주제가  <미 비포 유>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저 스미노 요루




                           Topic1. 소설과 영화에서 인물의 차이



                                                              [하루키]



이 하루키라는 인물을 영화에서 보면 묘한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계속 보다 보면 감정표현이 서툰 캐릭터라고 이해하면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을 보기전에 기대감을 가지게 됐죠. 소설에선 영화와 달리 인물의 내면 심리 묘사가 나오니까요.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을 틀렸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안 보고 소설만 보시면 이 하루키라는 고등학생 남자애가 싸이코패스란 생각마저 드실 수도 있습니다. 다행이도 싸이코패스는 아닙니다. 그는 적어도 긍정적인 감정은 잘 드러나거든요. 문제는 동정심이나  슬픔에 대한 감정들이 정말 부족하다 할 정도로 없습니다. 거의 소설 끝부분에서야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요.


다행이 영화에서 다양한 표정들을 봤으니 망정이지, 순간 소설에만 슬픔을 못 느끼는 설정이라도 있나라는 착각마저 했습니다.


내용을 모르시면 청소년 관람불가라거나 범죄의 한 장면으로 오인하실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장면을 봤을 아리쏭 했습니다. 진짜 화가나서 저렇게까지 하는걸까? 아니면 사쿠라의 유혹에 남자다움을 보여주려했던 서툰 액션이었을까? 정답은 전자였습니다.


사건의 원인은 사쿠라가 던진 미끼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여친으로 만들 생각은 없는 거야?


심지어 저말이 끝나고 뒤에서 살짝 안기까지 했으니. 보통의 남학생이었으면 정신을 못 차렸겠죠. 그런데 하루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사쿠라는 수줍어하며 장난이었다고 말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심리묘사가 나왔습니다.


 난 그녀에게 처음으로 몹시 불쾌하며 화가났다. 나를 이런 장난의 대상으로 모욕하는 그녀에게 커다란 분노를 느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보이는 것 없이 그녀를 힘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쯤되니 작가가 설정을 너무 과하게 잡지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없고 여자애랑은 인연이 먼 학창생활을 보냈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죠.


다행이도 말씀드렸다시피 소설에선 반대로 긍정적인 감성들이 잘 묘사가 됩니다.  

소설에선 하루키는 저 여행이 꽤 마음에 들었다고 얘기합니다. 행복하고 재밌는 시간이었다고 말이죠. 그리고 저 여행 뒤에 주말에 쉬고 있을 때 그녀의 문자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후반부의 병실이 나오는 장면에서 마침내 그는 속마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게 되죠.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 없고 용기가 없었다고 나옵니다.



                                                              [사쿠라]



이 하마베 미나미라는 배우는 개인적으로 정말 잘 캐스팅 됐다 생각합니다. 원작이랑 놓고 봐도 위하감이 잘 느껴지지 않을만큼 연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대사가 아닐까 합니다.


이 원작소설은 묘사보다는 대화의 비중이 많은 소설입니다. 특히나 이 소설에선 하루키와 사쿠라가 주고 받는 농담이 전체 대화의 반 정도를 차지 할 정도로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영화에선 그 많은 대사를 다 보여줄 수도 없거니와 다 보여줄 이유도 없습니다.


연출과 묘사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에선 사쿠라의 밝고 명랑한 이미지를 그녀의 대사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녀 앞의 죽음조차 평범한 농담으로 바꿔버리는 대사들을 보면 사쿠라가 얼마나 밝고 건강한 인물인지 알 수 있죠. 하루키의 대사가 보통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녀와 대화하는 분위기속에서 자연스럽고 재밌어집니다.


반대로 영화에서는 이런 것을 대처할만한 장치들이 필요하겠죠. 영화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밝고 화사한 배경들만으로 충분히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보통 청춘 로맨스 영화에서 잘 나오는 장면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 전반의 분위기와도 어울리기에 이렇게 보여줘도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때문에 영화는 원래의 주제까지 손을 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생겨 버립니다. 대화가 전반을 이루는 이 소설에서 끝부분에는 사쿠라의 내면 독백이 쏟아지기 때문이죠.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성찰적인 느낌의 내면 묘사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장면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부분이기때문에 이것을 뺀다면 주제를 바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Topic3. 소설과 영화의 주제 차이에서 영화에서 빠진 소설 부분과 함께 다시 한 번 다뤄보겠습니다.








                              Topic2. 소설과 영화의 내용상의 차이




Fact1. 사쿠라 끝내 하고 싶었던 질문은 뭐였을까?


하루키와 사쿠라가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설에선 내릴 때가 되어가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맞은 편에서 사쿠라는 쿨쿨 자고만 있었습니다.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 흔들고, 코를 꼬집고, 고무줄로 때리기까지 합니다.


보통 사람은 이름을 먼저 부르는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죠. 보통 사람이라도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지 않을 때나 저렇게 하는 거지, 아직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때리거나 흔들지 않습니다. 아니면 혹시 이름을 모른다거나요. 그럴리는 없겠죠. 분명히 위와감이 드는 부분입니다.



그녀가 입원에 있는 병원실에서 하루키는 마지막 진실&도전 게임을 합니다. 그녀는 여기서 자신이 이긴다면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는 바람에 역으로 하루키한테 질문을 받죠. 나중에 유서를 통해 이때 하고 싶었던 질문이 나옵니다.


                                         왜 너는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 거야?


주인공이 워낙 이상하게 불리는 것만 기억에만 남았는데 생각해보니 하루키도 사쿠라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쿠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했던 겁니다. 그렇기에 기차안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깨우는 어색한 내용이 중간에 끼워져있었던 거죠.


우선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친밀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의미로 통하겠죠. 저기있는 하루키를 부르는 호칭중에 'xxx군'을 사쿠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면 분명히 그녀는 하루키랑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름이야 그냥 불러달라고 하면 되는 거니까 굳이 '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 거야?'라며 게임을 통해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 보다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그런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저 장면에서 할 수 있는 질문은 당연히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입니다. 영화 내내 마음을 속시원하게 털어 놓지 않는 하루키와 달리 그녀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사랑의 표현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죠.


이 소설에서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소설에선 사쿠라의 퇴원이 연기될 마침내 주인공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줍니다.하루키는 그 동안 자신 외의 사람에겐 선을 그으며 타인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루키와 사쿠라의 취향차이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인데 사쿠라는 커피를 마셔도 설탕이나 우유를 넣은 것을 먹고 하루키는 그대로의 커피만 먹습니다. 이 외에도 하루키는 무언가 섞이지 않은 그대로의 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 그들이 이름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는 말은 서로를 마음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사쿠라는 하루키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자신을 대해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소설 중에 이런 하루키의 독백이 나옵니다.



그녀는 삶이란 누군가와 통하는 것이라 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그녀가 내게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준 순간
난 그녀가 내 안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Fact2. 주인공의 이름이 소설에선 딱 한 번 나온다?


소설에선 주인공 이름이 지독하게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이름이 안 나오는 설정인가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드디어 구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가 주위 인물들로부터 불리는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 포함해서 영화를 보신분들은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럼 이름이 아니라 뭐라고 불렸을까? 

그래서 제가 소설에서 그가 불리는 별명들을 대충 세봤습니다

따분한 클래스메이트 3번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 13번

우울한 분위기의 클래스 메이트 4번

사이좋은 클래스 메이트 7번

xxx군 5번


놀랍게도 저런 별명들로 주인공의 이름이 전부 대체 돼 있습니다. 저렇게까지 불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현실적이고 다분히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껌을 주는 저 친구도 영화에선 이름을 불러준다.

소설을 잘 읽다 보면 이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중에선 하루키가 워낙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서 주위에 친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위에서 주위에서 자신을 향한 반응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아니죠. 단지 먼저 다가서지 않을 뿐입니다.


사쿠라와 여행을 다녀온 날 교실은 크게 떠들썩합니다. 교실에서 제일 조용한 한 학생과 교실의 제일 활발한 여학생 단 둘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문이 났으니 그럴만합니다. 하루키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사쿠라에게로 가서 반 친구들 사이로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돌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사쿠라는 웃으면서 막상 알면 그렇게 나쁘게 얘기도 아닐거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소설에선 주인공의 시각을 빌리다 보니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보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루키가 한 독백에서 그의 특이한 취미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난 한번씩 타인이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부르는 지 상상의 시간을 갖는다.


그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즉 자신만의 상상을 바탕으로 그들이 나에 대해서 느끼는 마음을 추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실제로 저렇게 별명으로 불려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루키가 저렇게 듣고 싶었던 겁니다.

'날 따분하다 생각하는 사람'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날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실제로 사이가 좋아졌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사이좋은 사람'


그렇다면 'xxx군'은 무엇일까요. 분명 이름으로 불린 것은 맞는데 왜 저렇게 금을 그어놓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루키 자신에게 있습니다. 작중에서 하루키는 사쿠라가 죽고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공병문고를 받게 됩니다. 공병문고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드디어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알게 됩니다. 사쿠라를 만나면서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행복과 시간,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작중에선 바로 이때 하루키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자신을 어머니에게 소개하면서 나오게 됩니다.


결국 별명와 가려졌던 허물이 사라지고, 자신의 이름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려고 변화하는 하루키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Fact3. 소설에선 어른 하루키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은 학교 선생님이 된 하루키로 시작을 합니다. 어느덧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서 한 때 도서관리위원이었던 그는 이제 도서실 관리 선생님까지 맡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소설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어른인 쿄코도 없습니다. 즉 이건 영화에서만 나오는 장면입니다. 영화에서는 성인이 된 하루키가 웬지 그녀를 잊지 못하고 뒤를 쫓고 있는 느낌입니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게다가 그녀가 하루키는 선생님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는데 진짜 그대로 되버렸습니다.



영화에서 이러한 미래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로 표명상의 이유는 사쿠라의 바램되로 쿄코와 하루키가 친구가 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하루키는 그녀가 죽고난 뒤에도 성격을 바꾸지 못했나 봅니다. 선생님이 되어서도 학생 때의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에서는 소설에 나오는 소년기의 하루키 성장이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하루키는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변화하려 꿈틀되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결국 하루키가 어엿한 어른이 되어 사쿠라의 남은 쪽지를 통해 내면 성장을 완성한다는 설정입니다.

그치만 세월이 너무 흘렀는데....






Fact4. 쿄코와 껌을 주는 친구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을까?



소설과 영화의 결말은 조금 다릅니다. 언급했듯이 소설에서는 하루키가 학생인 체로 마무리 됩니다. 작가가 바라는 모든 내면적 성장이 완성된 체로  끝나는 것이죠. 영화와 달리 쿄코와도 학생 때 친구가 됩니다.



사쿠라가 죽고 그녀의 집에서 공병문고를 읽은 하루키는 본격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를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쿄코와 친구가 되는 것이었죠. 그는 쿄코에게 연락을 해 사쿠라와 마지막으로 보기로 했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시작부터 어색해서 그동안 무슨일인지 더듬거리면서 털어 놓으려고 하는데 그녀에게 뺨부터 맞고 시작을 하죠. 그래도 하루키는 용기를 내어 공병문고를 읽어달라고 합니다.


공병문고를 읽은 쿄코는 마침내 사쿠라의 비밀과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왜 끝내 자신에게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지 다시 하루키에게 화를 내죠. 하루키 입장에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삼자대면을 하면서 얘기하려 했지만 사쿠라가 갑작스레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래도 하루키는 용기를 내어 쿄코에게 친구가 되어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되어주세요 라고 말하는게 사실 전 좀 낯섭니다. 일본식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선 저런말을 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쿄코는 고개를 저어버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하지만 그 뒤로 결국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같이 사쿠라의 묘에 참배하러가기도 합니다. 이젠 예전에 사쿠라와 같이 떠들던 농담을 쿄코와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때 하루키는 실수로 껌을 주는 친구의 이상형이 쿄코란 말을 흘려버리면서 소설은 끝나게 됩니다. 이런 부분을 살려 미래의 이야기까지 다루는 영화에서는 결국 둘을 결혼하게 만들어준듯합니다.


정말 이 친구는 한결같이 껌을 가지고 다니네요.








Topic3. 소설과 영화의 주제 차이


소설과 영화의 제목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君の膵臓をたべたい)를 어떻게 볼 지가 바로 주제의 차이입니다.


영화에선  췌장을 먹는 다는 것에 2가지 의미가 나옵니다.

1. 내장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내장이 건강해진다.

2. 다른 사람의 무엇을 먹음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이 내게 깃든다.


1번은 그냥 흔한 속설이고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2번입니다. 진짜로 내장을 먹는다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닐테거니와 저건 그냥 사쿠라가 하는 농담이었습니다.



영화의 이 장면에서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묻습니다.


혹시 내가 정말로 죽는게 진짜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떡할래?


항상 밝은 분위기의 그녀가 던진 비수같은 말이었습니다. 물론 저 말이 너의 췌장을 달라는 건 아닙니다. 겉으로 명랑한 척하지만 그녀도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겉으론 죽음을 받아드리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티를 낼뿐 사실 그녀는 더 살고 싶어 합니다.



사쿠라는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그에게 하루 대사나 행동을 봐도 너무 명확하죠. 그래서 그에게 약올리듯이 유혹하는 장난을 칩니다. 물론 그녀도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결국 하루키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고백을 할 수 없는 거죠.


이와 동시에 사쿠라는 하루키의 마음을 열고 싶어합니다. 스스로 만든 마음의 벽 때문에 하루키는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꺼내지 못합니다. 설사 하루키가 사쿠라를 좋아하더라도 그것을 사쿠라에게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사쿠라의 입장에서 자신의 췌장을 누군가가 먹어준다는 것과, 자신이 상대방의 췌장을 먹는다는 것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하루키가 자신의 췌장을 먹어준다면 자신이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루키에게 깃들어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쿠라가 하루키의 췌장을 먹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의 슬픔과 못 다 전한 감정들을 들여다 봐달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살아줘. 하루키 안에서 계속 살고 싶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렇다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췌장을 먹는다는 의미는 1번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소설에서는 저것에서 추가로 3번째 해석이 나옵니다. 인물설명에서 사쿠라에 대해 얘기할 때 소설에는 사쿠라의 내면 성찰이 많이 나온다고 얘기했습니다. 즉 영화와 달리 소설은 하루키와 사쿠라 둘 다 내면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쿠라가 하루키의 좋은 변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하루키 역시 사쿠라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쿠라는 살아가는 것이란 누군가와 통하는 것이라 얘기합니다. 즉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녀는 곧 죽습니다. 죽으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쿠라가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은 타인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녀 혼자서는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결국에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온 사쿠라는 내면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문득 하루키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하루키가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뜻밖에도 그런 하루키를 보고 자신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삶의 가치를 오로지 스스로 자신 혼자만으로 정의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신 이외의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만으로 완벽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루키가 사쿠라가 필요하다며,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말합니다. 즉 삶의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한 채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사쿠라는 자기 자신이 죽고 잊혀져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작중에는 독백으로 사쿠라는 마음속으로 하루키처럼 되고 싶어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루키에게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반대로 하루키는 사쿠라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사쿠라와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 혼자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사쿠라같이 누군가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것이 소설이 끝날때에 변해있는 하루키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완전히 반대 성향이었던 두 명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두명은 바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종이의 앞뒤면 처럼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설의 주제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3번째 의미는

서로에게 가까워지며 완전해지는 삶의 의미 가 아닐까합니다.




이전 01화 작품이 원작과 만나는 시간. 미 비포 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