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가끔 우리가 생각했던 내용이 사실 원작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바로 디즈니가 그런 경우입니다. 기존에 있는 원작 동화를 가져다가 각색을 하고 재탄생시킨 것이죠.
주제를 명료하게 바꾸고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디즈니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미녀와 야수'라는 이야기는 그동안 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다 비슷해 보여도 분명히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디즈니에서 각색되어 만들어진 작품과, 원작 동화를 참고하여 만들어진 작품을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우선 디즈니와 원작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초점이 다릅니다. 디즈니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어리고 이기적인 왕자가 저주에 걸리는 장면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즉 초점을 왕자와 그가 살고 있는 성에 맞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벨의 배경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녀는 6명의 형제자매의 막내딸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에서는 발명가인 아버지의 외동딸로 나오죠. 디즈니에서는 그녀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원작에 따르면 그녀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큰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시골로 내려온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벨의 배경에는 일절 설명이 없었으나, 이것이 뒤에 실사 영화로 제작되면서 가족들이 원래 파리에서 살고 있었으나 흑사병으로 인해 어머니를 두고 시골로 도망쳐 내려왔다는 설정이 추가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었던 벨이 살고 있는 낭만적인 배경의 마을은, 사실 원작에선 가업이 몰락해 도망쳐 내려온 집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두 내용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다르기 때문에 벨과 야수의 만남도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디즈니 쪽은 발명가이고 원작에서는 상인이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 이유도 달랐습니다.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길을 떠나는 이유를 언급해주지 않는데,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따르면 저 장면은 아버지가 발명대회를 이유로 마을 밖으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길을 잃어 야수가 살고 있는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가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상인인 아버지가 도시로 가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들이 빚을 지고 있었던 부랑자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건달들의 위협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아버지는 숲 속에서 길을 헤매게 되고 우연히 야수가 살고 있는 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야수를 먼저 만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벨을 위해서 거기에 있는 장미꽃을 꺾어가는 것도 같습니다. 디즈니의 영화를 보면 아버지가 장미꽃을 꺾은 죄로 야수가 아버지를 성에 가두겠다고 합니다. 물론 훔친 것은 아버지가 맞지만 가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장면은 사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장미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장미꽃을 꺾기도 전에 야수에게 붙잡혔었기도 했고, 자신은 저주에 걸렸는데 무단으로 성에 침입한 벨의 아버지에게 화풀이 같은 이유로 가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디즈니의 영화에서 나오는 '장미꽃을 꺾은 죄'는 어디서 유래된 부분일까요? 바로 원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원작에 따르면 야수가 '장미꽃 하나는 목숨 하나'라고 얘기합니다. 이게 어찌 된 소리인지를 얘기하려면 우선 야수의 저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해야 합니다.
원작과 디즈니에서 저주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디즈니에서 왕자에게 내려진 저주의 이유는 '겉모습만 중요하게 여겨 내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등한시한 죄'입니다. 그렇기에 외모를 끔찍한 야수로 변하는 벌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 외면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는 과제를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작에서 왕자는 어떤 죄를 짓게 된 것일까요. 바로 '숲의 신의 딸'을 죽인 죄입니다.
원작을 모르시는 분이라면 저 이유가 황당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원작에서는 왕자가 야수로 변하기 전에 이미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저기 곱슬머리의 화려한 복장을 걸친 남자가 바로 원작의 왕자입니다. 남자다움을 과시하며 으스대는 것을 좋아하며 사냥을 자주 다닙니다. 어찌 보면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에서 나오는 개스톤이 왕자와 합쳐졌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저 여인은 사실 숲 속의 요정이었는데 인간이 하는 사랑이 궁금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평소의 여인께서는 왕자에게 사냥을 멈춰달라고 부탁을 하죠. 왕자는 딱 한 번만 사냥을 하고 이젠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하필 그의 마지막 사냥감이 사슴으로 변한 그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날 하필 숲 속에서 사슴을 변신해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던 왕자는 그 사슴을 발견하곤 쫓다가 화살을 쏘아 그녀를 맞추게 되죠. 사실 그냥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됐을 텐데 왜 저렇게 비극적으로 죽어야 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원래 동화라는 것이 완결성이나 합리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왕자의 품에 안겨 죽습니다. 그때 숲의 신이 등장해서 왕자를 야수로 만들어 버리는 벌을 내립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다시 한번 찾아오면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동물로 변한 자신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죄로 겉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하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의미인듯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원작과 디즈니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녀가 흘린 피는 장미꽃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원작에서는 '장미꽃 하나는 목숨 하나'라는 말을 쓴 듯합니다. 디즈니에서는 저런 배경이 없기 때문에 장미는 단순한 꽃일 뿐이죠. 그리고 원작과는 다르게 장미꽃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시간제한을 거는 용도로 쓰입니다.
이렇게 디즈니와 원작에서는 내막의 차이가 있습니다. 디즈니는 아버지가 성에 갇혔기 때문에 찾으러 왔다가 대신 갇히게 되죠. 그러나 원작에서는 조금 다른데, 아버지가 야수에게 장미를 꺽은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딸을 위한 선물'이었다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야수는 자신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더러 그 딸을 대신 데려오지 않으면 가족을 하나씩 찾아가 죽이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이 이야기를 가족에게 전합니다. 결국 벨은 어쩔 수 없이 자진해서 야수를 찾아가게 됩니다.
디즈니와 원작 모두 처음에는 서로 간에 갈등이 많습니다. 외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서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 부분을 진행하는 면에서 디즈니는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디즈니의 장르가 판타지이면서 '뮤지컬'이란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간에 직접으로 내뱉지 않는 말이나 속마음의 얘기를 전부 노래로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개인이 가지는 생각이나 서로 간의 생각을 엿볼 수 있죠.
그러나 이런 부분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디즈니의 방식을 두고 세련되었고 원작이 구식에다가 직설적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작에서 그러한 부분을 대신할 수 있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겉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는 대사만이 난무합니다.
원작과 디즈니 모두 야수와 벨이 식사하는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야수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마주 보고 먹지는 않고 돌아서 앉아 있기만 합니다. 디즈니에서는 같이 먹을 때 벨이 야수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말을 잘 내뱉지 않습니다. 원작이 자기표현 확실하고 기가 센 이미지라면, 디즈니는 좀 더 사려 깊고 착한 성격으로 나옵니다. 원작에서는 저렇게 뒤돌아 앉아 있는 야수와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다 벨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말에 허세가 많은 것 같군요. 거슬리네요. 당신의 그런 모습을 고쳐주고 싶어요.
좋게 말하면 서로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당돌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벨과 야수가 춤을 추는 장면에 대해서 얘기해야 합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고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연출됩니다. 둘의 사랑이 무르익고 서로 안에 있는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장 면도 원작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합니다만 조금 느낌과 순서가 다릅니다. 디즈니에서는 이 장면 뒤로 벨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야수가 마법의 거울을 통해 벨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벨을 보내주게 되죠.
여기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벨을 보내준다는 것은, 겉으로 그녀를 볼 수 없어도 마음을 통해서는 언제든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이죠. 디즈니에서 야수는 중간에 다음과 같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했었습니다.
사랑은 비천한 것도 귀하게 만들지. 사랑하면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거든. 그래서 그림 속의 큐피드는 늘 장님이라네.
따라서 야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실사 영화에서는 야수가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은 것을 알고도 벨이 떠나버리지만, 디즈니의 초기 애니메이션에서는 저런 사실조차 벨이 모르고 떠났습니다. 그렇기에 야수의 사랑을 비극적이면서도 한층 더 아름답게 보여졌던 듯 합니다.
그렇다면 원작에서는 어떨까요. 벨이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하는 건 똑같지만 원작에선 흥정을 합니다. 야수가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 같으니 집에 하루 보내주면 당신과 춤을 춰주겠다고 말합니다. 전혀 인간미 없는 거래를 제안했지만 야수는 솔깃했기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야수는 혹시 자신에게 마음이 생긴 것이지 떠보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대단합니다. "당신 같은 야수를 사랑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모양입니다. 디즈니의 벨도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는 직설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광분한 야수는 버럭 화를 냅니다.
나도 내가 어떤지 알아.
날 좋아해 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나도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이 말을 하며 야수는 약속 따윈 지키지 않겠다며 돌아서서 사라집니다. 이쯤 되니 야수가 좀 애처로워집니다. 물론 원인은 야수에게 있는 것이지만 원작에서 이 부분을 보면 둘의 사랑이 힘들 수도 있겠다고 느껴집니다. 원작 영화를 보신분들도 아시겠지만 여기까지 진행되면서 벨이 야수에게 호감을 느끼는 부분이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죠.
위에서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에서 둘이 춤을 추는 장면에 대해서 얘기할 때 서로의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얘기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이지만 거의 다 왔다고 할 수 있었죠. 디즈니는 원작과 달리 문제 상황과 해결방법을 명확히 연결시켰기 때문에 밟아야 할 수순이 분명합니다.
야수의 문제 : 외적인 것을 전부로 알다가 벌을 받음.
벨의 문제 : 편견과 전통적 가치관이 전부인 마을에서 자람.
야수의 해결 방향 : 마음속 아름다움, 즉 진정한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
벨의 해결 방향 : 내면세계의 확장. 즉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가치관을 넘어서는 것.
구체적 해결 : 벨과 야수가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
왕자의 문제는 너무나 쉽고 명확하므로 벨의 문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벨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그녀 주위 사람들은 항상 벨이 겉도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특별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벨은 항상 책을 읽습니다. 책만이 자신의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책을 끼고 사는 이 아가씨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작은 시골을 벗어나 더 멋지게 살고 싶어. 더 넓은 세상을 모험하고 싶어.
벨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여자란 괜찮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만 낳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곳입니다. 즉 전통적 가치관이 심하게 자리 잡은 곳이죠. 이런 곳은 일찍 탈출해야 하는 것도 맞고 그런 벨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단 그녀의 생각에는 오류가 좀 있습니다.
첫째로 그녀가 모르는 세상은 책을 통해서만 본 세상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벨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을 이 구식이고 따분한 시골과 멋진 바깥세상으로 이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곳을 나가면 달라질 거라 생각하죠.
둘째로 벨은 회피하며 해결할 수 있다 믿습니다. 스스로 문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가면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처럼 말입니다.
벨로서는 애석한 일입니다. 겨우 마을을 벗어나게 됐는데 무서운 야수와 함께 성에 갇혀야 했으니까요. 근데 이것은 일차원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젠 저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이해해봐야 하니까요.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밖으로 간다는 것은 자식으로 독립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과 맞서고 스스로 부딪히기 전까지는 그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성에 갇히고 무서움의 대상과 직면한다는 것은 그녀가 홀로 서는 과정입니다. 탑에 갇혀 중간에 그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순진했던 난 자신이 넘쳤지만 지금의 나는 되려 세상을 모르겠네.
난 용감해졌으나 이젠 자유를 잃었네.
그녀도 체감하기 시작합니다.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고 그녀가 책에서만 본 바깥세상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요.
벨은 이제 자신이 기존의 생각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도 알아야 합니다. 야수는 그녀가 그동안 보아왔던 사람과는 다릅니다. 첫 이상은 개스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지만 알면 알 수록 속이 착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분적으로 보아 오고 획일적으로 판단했던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과연 자신이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타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벨이 중간에 성에서 도망칩니다. 스스로를 이기지 못해서 회피하는 과정이죠. 그런데 피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숲 속에는 늑대와 같은 다른 나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거든요. 즉 이제는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야수가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늑대 무리와 싸워서 지켜냅니다. 부모가 아닌 존재도 자신을 신경 쓰고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수가 되기 전 왕자의 아픔을 알게 됩니다. 왕자는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람의 따뜻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허영심 가득한 세상을 보면서 성인이 되었죠. 즉 마음의 무언가가 결핍된 어른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극복하려면 가족과도 같은 따뜻한 사랑이 필요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벨과 연결될 것이라는 말이죠.
벨은 야수를 두려워했지만 이후엔 그대로 직시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결과적으로 야수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통해 자신도 내면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누군가 덕분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사랑도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앞에 있었죠. 자신이 벨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그 사랑하는 대상을 아버지에게 보내줍니다. 자신이 겉모습이 아무리 추악한 괴물로 영원히 남게 될지라도 자신의 사랑 또한 영원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먼저 해결한 것은 야수입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은 벨이었죠. 그녀는 스스로를 자꾸 의심합니다. 늘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야수를 사랑함으로써 성에 살게 되는 건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오류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야수가 느끼는 마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유롭고 귀중한 것이죠. 즉 벨은 아직 현실의 좁은 가치관에 묶여 자신의 내면을 넓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종 해결은 뒤의 CHAPTER 4. 벨과 야수,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내다. 에서 다뤄보겠습니다.
이제는 원작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원작 또한 디즈니처럼 벨이 야수의 과거를 알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간의 갈등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벨이 꿈을 꾸면서 알게 됩니다. 꿈속에서 벨은 왕자가 좋아했던 여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왕자가 되는 꿈을 꿉니다. 즉 꿈을 통한 일방적인 전달을 통해 과거에 인물들이 겪었던 사건과 감정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원작에서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에 야수와 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디즈니처럼 속마음을 노래로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서로를 들여다보고 알아가고 있는 중인데도 정작 당사자들 간에 소통이 없다시피 하니 관객 입장으로서는 그들의 진심을 알기 힘듭니다. 어쩌면 각본의 내용과 연출이 몹시 불친절 한 게 아니냐고 느끼실 수 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시크한 그들의 이야기는 디즈니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솔직히 저는 원작에서 벨이 야수를 사랑한 것에 대해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녀가 가졌을 공포와 압박에 비해서 야수가 보여준 긍정적인 측면은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죠. 기껏해야 매일 갈아입을 옷을 챙겨주는 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화를 잔뜩 내고 나서야 나중에 사과를 했습니다. 형식적인 말이었을 뿐 아니라 다정한 말 한마디 없었고, 애초에 처음부터 두려움을 느꼈던 대상인데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받아들이기 힘들죠.
그러나 그녀는 야수를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비록 야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벨은 꿈속에서 그의 과거를 전부 보고 왔습니다. 왕자가 야수가 되기 전 사랑했던 여인의 마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왕자의 인간미, 그리고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이 벨의 마음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즈니처럼 야수도 벨을 집에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벨이 내가 이대로 도망쳐버리면 어떡하냐고 농담으로 말을 하자 야수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장미꽃을 줍니다. 장미꽃은 그가 과거에 정말로 사랑했던 사랑의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벨에게 건넨다는 것은 이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디즈니처럼 그녀가 야수의 과거를 보듬어준 것도 아니고 야수와 마찬가지로 벨 역시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야수도 그녀를 사랑하게 됐나 봅니다. 이 이해하기 힘들고 기괴한 원작 이야기는 수학 문제 풀듯이 하면 답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된 동화의 내용이라 그러하겠거니 넘어가야 합니다. 벨이 첫사랑과 닮아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차라리 편할 겁니다.
이제는 마지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해피엔딩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종단계가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원작과 디즈니 모두 야수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숙제를 완료했습니다. 자신의 겉모습이 어떻든 과거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면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수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주면서 증명됐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정은 이제 벨이 스스로의 숙제를 해결하고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디즈니에서 벨은 아버지가 마음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구하러 갑니다.
개스톤은 벨과 자신의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벨의 아버지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합니다. 저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개스톤에게 너무 쉽게 동조하고 따르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생략된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따르면 저 장면 이전에 개스톤은 이미 마을의 의사에게 벨의 아버지가 미쳤다는 진단을 내리도록 매수를 합니다. 마음 사람들이 그의 말을 쉽게 믿고 도울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아버지가 끌려가던 그때 벨이 막아섭니다. 야수는 실제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는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선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고 비웃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등지고 그런 괴물의 편을 든다고 벨을 적대시합니다. 하지만 벨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야. 진짜 괴물은 당신과 같은 사람이야.
바로 이 장면에서 벨이 자신의 숙제를 해결합니다. 바로 자신이 에워싸고 있던 좁은 세계와 맞서 싸우면서 말입니다. 그동안 벨은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며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도전하고 뛰어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 가려고 했죠.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부딪혀야만 합니다.
자신을 통념 안의 평범한 여자라고 가두려 했던 마을 사람들과 언쟁을 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녀의 내면세계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멀어짐으로써 처음으로 혼자 세상에 있는 것의 두려움을 느꼈고, 야수와의 시간을 통해 세상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가두는 가치관과 맞서 싸움으로서 스스로의 내면을 극복하고 확장합니다. 이제 벨의 숙제는 해결됐으니 돌아가서 사랑만 전하면 저주도 풀 수 있습니다.
이젠 원작을 보겠습니다. 원작에서는 야수에게 내려진 벌만 있고 벨에게는 딱히 문제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주를 풀기 위해서 벨이 해야 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 뿐입니다.
원작에서 야수가 있는 성은 숲의 신이 가시밭길로 가두고 있습니다. 즉 아무나 들어갔다 나갔다 할 수 없는 것이죠. 영화의 중반까지는 야수가 그녀에게 준 말과 장식 끈의 표식으로 쉽게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표식도 잃어버리고 말도 오빠가 타고 가버립니다. 그녀로서는 성으로 들어가는 입장 티켓을 잃어버린 셈이죠.
디즈니에서는 괴물을 퇴치하겠다고 마을 남자들이 성으로 쳐들어 갑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부랑자들과 벨의 오빠들이 성의 보물을 뺏겠다고 간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벨은 성에 남아있는 야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뚫어서라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동화스러운' 해결책이 나옵니다. 바로 숲의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죠.
숲의 신이시여 들어주소서.
성까지는 가는 길을 열어주소서.
이것이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단 한 가지입니다.
숲이 신이 그녀의 마음을 알아본 것인지 바로 가시밭 길을 열어줍니다. 그렇게 세련되지 않은 해결 방식이지만 이것은 원작 동화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과 저 대사가 의미하는 것은 그녀가 야수를 사랑한다는 것이죠. 신이 인정했다는 것은 그녀가 진심을 증명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왼쪽의 벨은 그 동안 쭉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충실했고 마지막까지도 애절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반해 오른쪽에 있는 원작의 벨은 그 동안도 너무 담담했는데 끝에가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 장면에서 야수가 죽어가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습니다. 야수에게 너무 늦어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야수가 그런 벨을 보고 미안한 것 맞냐고 반문할 정도니 말 다한 겁니다.
뭐 이런 것은 두 작품의 표현 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결국 저주가 풀렸으니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을 하는 게 맞습니다. 아무래도 디즈니쪽이 좀 더 상징들이 많고 해결방법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결국 두 이야기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모두 진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이야기는 결말 부분을 약간 소개할까 합니다. 디즈니에서 야수의 저주가 풀리는 동시에 성에 있는 사물들이 전부 인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즉 벨은 이제 공주님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왕자가 있는 성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인간이 된 왕자가 벨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됩니다.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게 되고 장인과 꽃장사를 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진실된 사랑'을 의미하는 장미를 잔뜩 기르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