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4)
보통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은 잘 없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잘 만들어진 명작은 덧칠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매체의 장점을 살려 원작을 넘어서는 감동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바로 쇼생크 탈출이 그 원작을 넘어서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이번 비교에서는 원작에서 영화로 넘어올 때 무엇을 더 부각하고 바꿨는 지를 초점으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 Stephen Edwin King
[앤디]
앤디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잘못된 판결을 받아 감옥에 온 인물입니다. 그 당시 자신의 실적을 높이고 사람들의 눈에 띄어 의원에 출마하고 싶었던 검사가 그를 끈질기게 유죄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내는 그 당시에 동네에 있었던 강도에게 당한 것인데 마침 부부 사이가 나빴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인 앤디는 이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하얀색'과 '파란색'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이 쇼생크 탈출이란 작품은 전반적으로 감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모든 억압을 물리치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신분적인 자유와 정신적인 자유를 모두 얻어야만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하얀색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이 사회에서 어딘가에는 소속돼 살아갑니다. 스스로 독립된 시간이나 공간을 갖는 것과 별개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 한반도라는 땅에서 대한민국이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색을 구분할 때 크게 1) 검정~회색~흰색 그리고 2) 파랑으로 구분되는데요. 1번에서 검정에서 흰색으로 갈수록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누군가가 검정이란 말은 그 사람이 완전히 어떤 사회에 소속돼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주인공인 앤디는 비록 신체는 자유롭지 못하게 감옥에 있을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흰색에 속한 인물입니다.
기본적으로 감옥에 들어갈 때 죄수들은 전부 회색 옷을 받습니다. 검정과 흰색의 중간의 색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왔다 갔다 하는 단계라는 의미입니다. 즉 감옥에 들어왔지만 아직 자신은 밖의 사회에 있었던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하얀색일 것이고, 반대로 체념한 체 감옥에 지내는 사람은 검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회색이란 늘 고뇌하고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사람들인 것이죠.
다음으로 파란색에 대해서 얘기해야 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검정~회색~흰색과 별개의 개념입니다. 흑백이 사회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신분적 자유를 의미했다면, 파랑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양심이란 남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파랑의 자유라는 것은 영화에서 돋보여지는 상징입니다. 즉 소설에서는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단지 신분만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까지 접근하고 싶었던 영화의 의도인 듯합니다.
즉 파랑이란 오로지 개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파랑이란 상징이 갖고 있는 문제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던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스스로 마음을 속인 채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가책은 자신이 어디를 가든, 어떤 상태이든 쫓아올 것입니다.
앤디는 처음엔 백색의 자유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범죄가 아니며 아무리 자신을 세뇌시키고 억압해도 정신적 자유를 뺏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파랑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들어오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앤디는 친구인 레드에게 고백을 합니다.
법으로만 따진다면 앤디는 무죄이고 억울하게 감옥을 온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쭉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너무 우연찮게도 자신에게 나쁘게 흘러갔고 스스로 악운의 소용돌이에 있었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앤디가 어느 날 자신은 죄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자신은 아내를 너무 사랑했지만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표현을 하지 않고 늘 이성적인 성격의 그는 늘 서운해하는 감정적인 아내를 모른 체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결국 외도를 하게 됩니다. 물론 아내가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앤디는 결국 자신이 아내를 죽인 것이라 말합니다. 스스로 아내를 더 신경 쓰고 사랑했더라면 아내가 그렇게 멀어지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리라고 말이죠.
이 고백을 통해 앤디는 스스로를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부자유에서 해방됩니다. 아무리 법적으로 그는 당당할지 몰라도 양심의 자유란 다른 것이니까요. 이 뉘우침의 고백은 앤디를 파랑의 자유로 들어설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백색의 자유와 파랑의 자유를 모두 손에 넣은 앤디는 감옥을 넘어 탈옥을 합니다.
[레드]
레드는 이 영화에서 회색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즉 검정과 흰색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이죠. 재밌게도 이 인물은 감옥 안에서 몇 안 되는 파랑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은 억울하고 죄가 없으며 무능한 변호사 탓'이라고 하는데 레드는 처음부터 죄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문제는 그가 백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냐죠. 회색을 상징하는 인물답게 그는 내면의 갈등이 많습니다. 레드는 감옥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살던 시간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지낸 것입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모범 죄수로 가석방을 받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갈 희망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드 스스로도 이미 감옥 밖의 자유는 체념한 생태죠. 대부분 저렇게 감옥에 오래 있게 되면 낙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레드 역시 이젠 감옥이 자신의 삶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앤디가 나타나 이런 레드를 흔들어 놓습니다.
앤디는 감옥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인물입니다. 앤디와 친한 레드는 당연히 그 영향을 받으리란 것이 분명했죠. 앤디의 자유를 향한 끝없는 힘 때문인지 레드도 조금씩 변해갑니다. 소설에선 나오지 않는 내용인데 영화 중간에 앤디가 감옥 안의 방송을 조작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틀어 버립니다.
참고로 피가로의 결혼이란 신분제도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이것이 만들어진 16세기에도 왕과 귀족을 반발을 사 상연이 금지된 오페라입니다. 이것을 듣고 레드는 얘기합니다.
그 목소리는 회색 공간뿐인 이 곳에서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그 벽을 허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순가 쇼생크의 모두가 자유를 느꼈다.
즉 음악이란 것은 이 영화에서 백색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앤디가 레드의 과거에 대해서 묻자 레드는 한 때 하모니카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고 답을 했었는데 그 뒤에 앤디가 레드에게 하모니카를 선물로 줍니다. 밤에 소등이 되고 모두가 자는 시간에 레드는 흰 나시를 입고 하모니카에 가볍게 입을 댑니다. 물론 옷 자체가 완전히 완성된 흰색도 아니고 하모니카로 한 곡을 다 연주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가 백색의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지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앤디는 스스로 감옥을 탈출하고 레드도 가석방으로 나오게 됩니다. 레드는 처음에 감옥을 나오고 나서 힘들어했습니다. 30년 넘게 감옥에 있었으니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당연히 말도 안 되게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감옥에서도 그가 늙어 밖에서 아무것도 못할 것을 아니까 가석방을 허락해준 것입니다. 레드는 밖의 세상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대부분의 삶을 살아온 감옥이 오히려 자신을 지켜주고 안정적인 터전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몇 번이나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앤디를 떠올립니다. 마침내 레드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사회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길을 가기로 합니다.
영화에서는 가석방 신분인 레드는 정해진 주거 구역을 일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레드는 굳을 결심을 하고 앤디를 만나기 위해 그것을 어깁니다. 추가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늙고 더 이상 그럴 용기가 부족했지만 결국에는 자유와 희망이란 큰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백색의 자유와 파랑의 자유를 모두 달성한 레드는 큰 자유를 상징하는 바다에서 앤디와 다시 한번 조우하게 됩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이러한 상징이 약하기에 둘은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브룩스]
브룩스는 원작 소설과 영화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인물일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대표적으로 검정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소설에서는 비중이 거의 없는 인물입니다. 잠깐 한 번씩 언급되고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죠. 원작에서는 앤디와 레드라는 두 명의 인물로만 초점을 맞춰서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브룩스를 추가하여 앤디(하양) vs 레드(회색) vs 브룩스(검정)의 3중 구도로 깔끔하게 정리해 버립니다. 즉 브룩스의 내용이 각색되어 비중이 늘어난 건 이 백색의 자유라는 주제를 더 강조하고 싶었던 영화의 의도인 것이죠.
검정이란 상징답게 그는 사회에서 내려진 신분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합니다. 나이도 이 영화에서 가장 많아 보이는데 그만큼 감옥에서 오랫동안 살은 것이죠. 감옥이 그의 자유를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스스로도 회복할 의지가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그에게도 가석방이 승인이 돼버립니다. 하지만 브룩스는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에 잠겨 칼을 휘두르며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바깥의 사회가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자신의 거의 모든 삶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이제 밖으로 내보내다니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레드는 이 부분을 결국 극복해 냈습니다. 마음의 한 구석에는 자유와 희망을 찾는 의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레드는 검정으로 넘어가는 회색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돌아와 흰색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룩스는 그러지 못했죠.
감옥이 그의 전부이고 삶인데 이러한 감옥에서 나가라는 것은 검정을 뜻하는 브룩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검정, 즉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길을 찾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검정이 감옥 밖에 있다는 말은 결국 잠재적으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니까요.
결국 그는 '브룩스 여기 있었다' 란 글을 남기고 자살을 합니다. 재밌는 것은 똑같은 장소에 레드도 같은 글을 남기게 되는데요. '레드 여기에 있었다'라고 말이죠. 두 사람에게서 선택의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저 글이 이중적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브룩스 입장에서는, 저곳에 있었는데 자신의 길을 멈추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의미이지만
레드 입장에선, 저곳에 있었지만 더 나아가서 이젠 자신의 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말이 됩니다.
Q1. 정말 탈옥을 한 사람이 앤디 한 명뿐일까?
당연히 탈옥을 시도한 사람도, 탈옥에 성공한 사람도 앤디 혼자가 아닙니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그동안 탈옥 미수만 400건이 넘었고 탈옥에 성공한 사람도 십여 명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앤디 이전에 탈출하여 아직도 잡히지 않은 전설적인 인물도 나옵니다.
애초에 감옥에 있는 저 많은 사람들 중에 탈옥을 시도한 게 앤디뿐이었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저 당시 감옥은 현대의 첨단 관리와 달리 몹시 허술하고 빈틈도 많았습니다. 즉 앤디가 굴을 팠던 것처럼 여러 가지 탈출 시도가 가능했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왜 이러한 내용을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앤디를 더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색깔을 깔끔하게 검정-회색-흰색으로 정리시키고 자유의지를 설정해 만들어 각각 분류까지 해놓았는데, 탈출하는 다른 엑스트라들이 많으면 자연스레 영화의 상징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Q2. 앤디는 정말로 그렇게 완벽한 멘탈의 소유자였을까?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그도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도 두렵고 불안해합니다. 다만 영화에서는 깔끔하게 다듬어서 보이지 않게 했을 뿐이죠.
원작 소설과 영화의 내용상의 차이에서 앤디의 탈출 시기가 다른데, 영화에서는 19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고 소설에서는 26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즉 7년이 차이 나는 것이죠. 그런데 소설에서는 앤디가 굴을 19년 만에 다 팠다고 나옵니다. 결국 비교하자면 영화는 굴을 다 파자마자 바로 탈출한 것이고 소설은 그 뒤로 7년의 뜸을 들인 겁니다.
소설에서는 이 시간적 이유를 앤디 내면의 불안감에서 찾습니다. 비록 굴은 다 팠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영화에서야 굴을 통해 나가서 하수관으로 들어가 쉽게 빠져나왔는데 사실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하수관이 끝에서 막혀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게다가 탈옥에 성공해도 빨리 발각되어 다시 잡혀올 수도 있습니다. 붙잡히지 않아도 밖에 숨겨 놓았던 돈이 사라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은 것입니다. 즉 앤디는 이러한 불안감에 쉽사리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영화는 그를 완벽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듯합니다.
Q3. 토미는 그저 죽어 사라져 가는 엑스트라일 뿐일까?
영화 후반부에 보면 감옥에 신참인 토미가 들어옵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아내와 딸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비해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짓고 들어온 케이스죠. 앤디는 감옥 안에서 검정고시를 보고 싶은 죄수자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었는데 토미도 그렇게 앤디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라고 한다면 원작 소설에서는 그가 그저 '전개의 도구'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는 처음엔 공부를 배우고 싶어 앤디와 인연이 생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토미는 앤디가 어떻게 누명을 쓰고 들어왔는지를 알고 있으며 사건의 진짜 범인을 알고 있는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있을 때 우연히 진짜 범인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앤디의 무죄를 밝힐 결정적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소설에서 그가 소장의 회유에 넘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지금의 교도소가 아니라 일도 시켜주고 저녁에는 집에도 보내주는 아주 편한 곳으로 보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죠. 즉 토미는 소설에선 그저 앤디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인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그가 공부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도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가족과 스스로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죠. 그는 감옥 안에서 검정고시를 보았는데 소설에서는 합격여부도 알려주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그가 간신히 합격됐다고 알려줍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장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당당히 앤디를 도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남의 물건을 훔치고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이죠. 이미 자신을 조금씩 바꾸어가고 있으며 남의 불행과 잘못된 사실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비록 소장의 말을 잘 듣는다면 감옥 안에서 편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소설과 달리 소장이 시킨 간수의 총에 맞아 제거되죠. 영화에서는 그가 백색의 자유에 가까워지는 인물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Q4. 레드는 정말 앤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벅스톤에 온 것일까?
레드가 감옥에서 나오고 앤디의 흔적을 좇아 맨 처음으로 간 곳이 벅스톤입니다. 영화에서는 앤디가 이곳에 와달라고 레드가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설에서는 그러한 약속도 없었고 레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앤디가 궁금해 흔적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물을 소개할 때 영화에서만 가석방 죄수자의 주거제한이 있다고 얘기를 했는데요. 즉 소설에서는 여행을 해도 되지만 영화에서는 이동에 문제가 생긴다는 설정을 추가한 것입니다. 영화는 1) 레드가 벅스톤에 가야 한다는 약속 & 2) 레드의 제한된 주거 지역 이 두 가지를 맞물려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정리하자면 레드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한된 주거 지역을 이탈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레드가 스스로 백색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레드가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점점 정신적 자유를 손에 넣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인 듯합니다.
Q1. 왜 레드는 마지막 가석방 심사에서 반항한 것일까?
소설에서는 딱히 소개되지 않지만 영화에 따르면 레드는 가석방 심사를 그동안 일정 주기로 받아왔고 마지막 심사에서 적격으로 판정되어 출옥을 했습니다. 가석방 심사에서 받는 질문들은 다 비슷합니다.
당신은 회개하셨습니까?
당신은 밖에 나갈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습니까?
당신은 이제 교화되었습니까?
물론 저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동안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죠. 저러한 질문들이 다 자신을 길들이고, 세뇌시키며, 사회에서 편하게 사육하고자 하는 의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하는 대답을 해준다고 석방시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이고 죄수가 아주 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즘 풀어주는 것입니다. 레드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레드는 마지막 석방 심사 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를 뉘우쳤냐고 했나?
젊은 날에 끔찍하고 바보 같은 일을 했던 자신을 만나고 싶어.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어. 지금의 현실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없지.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 없어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교화라고? 헛소리하지 마. 이젠 더 이상 내 시간을 뺏지 마.
이러한 대사는 영화에서만 나오는 얘기입니다. 소설에는 레드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 짧게 나오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가 당당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후회하는 장면은 앤디가 자신의 죄를 인정했던 부분과 비슷한 장면입니다. 마찬가지로 파란 옷을 입고 있죠.
즉 가석방 심사처럼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씻었냐고 묻는 것은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레드가 저렇게 얘기하는 대사는 파랑의 자유를 부각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Q2. 왜 앤디는 그토록 멕시코 바다로 오고 싶어 했을까?
소설에서는 결말에 앤디가 바다에 가 있으리라고만 레드가 추측하는 내용만 나옵니다. 영화처럼 멋진 태평양 바다에서 앤디와 레드가 조우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죠. 물론 그냥 보기에도 시원시원한 마무리지만 영화는 특히 이 '푸른 바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화에서 앤디가 바다를 얘기할 때 '아무것도 기억을 할 수 없는 장소'라고 얘기합니다. 저 말은 멕시코인이 태평양을 저렇게 말한다는 부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앤디가 아내에게 느끼는 죄책감의 기억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억 또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야 하지만 그것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으면 스스로를 옭매이고 정신을 갉아먹어 버립니다. 즉 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기억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악몽 같은 것이죠. 그렇기에 영화에서 앤디는 감옥을 빠져나가면 파랑의 자유를 찾아 늘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