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제작년 뮤지컬 레베카를 관람하고, 원작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와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찾아본 후 결말 뒤의 이야기를 상상한뒤 구성하여 만들어 본 것입니다.
After
간만에 이곳을 다시 방문한 사람을 향해 몸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 것은 전에는 보이지 않던 민들레 꽃들이었다.
아니, 전에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난 볼 수 없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눈을 가리는 커다란 장막이 드리워진 것도 모른 체, 난 작년 몇 달간 말그대로 완전히 미쳐 있었다. 멀리 뒤에선 나의 그녀가 꽃을 코에 가까이 대고 봄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자 그녀는 팔을 크게 흔들었다. 악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나른다
그래. 날 잠식하던 어두운 속삭임들은 형태만 바꾸어 날 끊임없이 괴롭혀 왔어. 작년 그녀를 만났던 몬테카를로 언덕에서도 난 저 위선적인 파도소리와 거짓된 냄새를 억누르지 못했던 거야. 만일 나의 그녀가 내 손을 붙잡고 희망의 불꽃을 노래하지 않았다면, 내 스스로 만들어낸 깊은 심연에서 날 꺼내 주지 않았다면, 나야 말로 저 깊은 바다속에 가라 앉았을지도 모른다.
막심 드 윈터는 다시 봄이 찾아온 맨덜리의 사라진 터를 찾아왔다. 푸른 생명 사이로 드문드문 검게 그을린 자국이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공간은 아직 눈에 보이도록 선명했다. 막심은 거의 들판이 된 그곳에서 반쯤 타버린 일지를 발견했다. 바스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들어서 넘겨보았다. 꽤 소실되어 중간 중간 읽지 못하고 뛰어넘어야 하지만 그것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히(나)는 이곳에 도착하면 일부러 남편의 가까이서 따라다니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과거를 이겨냈고 충분히 극복했지만, 때론 과거를 곱씹는 시간이 현재의 스스로를 더 강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난 그 사건 이후 그이는 비록 잠시 과거의 길을 돌아보며 어두웠던 자신과도 조우하겠지만 결국은 다시 현재의 내게 돌아오리 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단지 지금 이 순간 잠시 내 곁을 떠나 있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민들레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중 언덕 근처에서 낯설지 않은 난초가 보였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밖에서 자라고 있는 것 치곤 매우 정갈하면서도 품위 있고 또한 아름다웠다. 어째서일까. 이것은 맨덜리와 무척 어울리는 것 같지만 또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 8월 17일 안개가 짙던 날>
파도의 세찬 소리가 내 바로 옆에서 때리는 듯하다.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 저쪽의 별관으로 보이는 곳의 방에서도 아주 지겹게도 들을 수도 있을 터. 만약 저 곳에 손님이 묶는다면 그건 이 곳 주인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작자임에 틀림없어! 물론 난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전혀 몸을 비틀거나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그건 이 분의 완벽하고 고결한 위엄을 칼로 긁는 짓거리 마찬가지로 하찮은 일일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레베카는 한치의 미동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들여놓지 않을 것 같은 크고 굳게 잠긴 철문이 그녀 앞에서 부끄런 팔을 감추고 숨을 때도, 먼 바다를 건너 도착한 부인을 마중하러 나온 하녀들을 무심히 지나칠 때도 그녀는 아무것도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짐을 들고, 바로 그녀의 뒤에서 걸을 자격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드 윈터 부인,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이 곳의 관리인 프랭크 크롤리입니다. 막심은 저택에 있는 자기 방에서 저녁에 입을 옷을 고르고 있을 겁니다.”
프랭크란 집사는, 맨덜리의 주인인 막심의 오랜 친구였다고 들었다. 그와 어릴 때부터 터울없이 지낸 친구로, 기품 있고 당당하며 힘이 있어 보였다. 당분간 이 자를 거울로 삼아 나를 바꾸어야 한다. 오직 변하지 않고 고귀할 수 있는 것은 레베카뿐이다. 난 그녀에게 언제나 가까운 존재로 있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
“나의 방은요?”
“네? 아, 부인께서 잠시 쉬실 방은 하녀를 통해 안내해드릴 겁니다. 저녁 만찬이 준비되면 다시 아이를 시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예상대로 건물 안에서도 희미하게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듣기 좋아졌다. 하녀들이 안내한 방에 들어섰을 때, 난 그녀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다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온통 밝은 느낌을 파스텔 색깔, 하얗고 커다란 느낌, 구름을 연상시키는 커튼, 오직 비싸고 품격 있어 보이는 가구와 장식만이 이 곳의 무게를 더하는 듯했다. 이곳의 느낌은 마치…… 그래, 날이 정말 좋을 때 바다의 색깔.
“맨덜리가 아니야”
그녀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하녀가 지내는 방으로 안내 받기 위해 다른 종들을 따라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손으로 나를 불렀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강하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볼 때면 언제나 팔꿈치가 지릿지릿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까, 프랭크라는 집사를 뚫어져라 볼 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알고 계셨습니까?”
“넌 마치 찔레꽃처럼, 모습을 바꾸려 할 때 그러곤 하니까”
“그 사람처럼 마님을 모실 자격이 되는, 그런 적합한 모습이 되려 합니다.”
“날 이젠 그렇게 부르는군. 오! 그 고귀한 품격, 세상 인정한! 사랑스럽지만 모두가 어려워 할 그 이름! 드 윈터 부인! 부친이 죽고 콘월에 있는 그의 거대한 저택과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남자의 안방마님 말이지?”
“제가 마님을 부인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 그대로 부른다면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건방진 아랫것들이 하나 같이 다들 맞먹으려 할 것이며, 친근함을 핑계로 삼아 얕잡아 보려 할 겁니다. 마님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맨덜리 그 자체로, 저 거대한 성벽이 마님의 고귀함으로 쌓아 올린 것처럼 예우해 드려야 합니다.”
“그 말은 내 본래 이름이 하찮기 때문인가? 감추려 하다니, 진실되지 못하군”
“그 대신 제가 마님의 비밀 없는 진짜가 되겠습니다. 마님도 제게 그래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글쎄, 비밀을 비밀로 불리는 그 순간, 이미 비밀이라 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는 것을…”
난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 8월 18일 새벽, 파도가 거세게 부서지는>
저녁의 연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신 마님은 홀연히 새벽 중에 그곳에서 사라지셨다. 모든 하녀와 프랭크가 저택의 이곳저곳 뛰어다녔고, 마침내 내가 그녀를 찾아낸 곳은 서쪽의 별관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 처음으로 보았던 그곳. 그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보라빛 커튼 장막과 춤을 추고 있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맨덜리의 파도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와 같다고 느꼈을 때, 난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도 않고 곧 바로 그녀의 방에 있는 짐을 가져와 새로운 곳에 두었다.
이후 주인님과 마님이 완전히 방을 따로 쓰시기로 하고, 하녀들은 마님께서 주인님의 미움을 받아 외딴 방으로 들어갔다 떠들었다. 하지만 난 알아. 처음부터 이 방이 마님을 위해, 오직 마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막심은 책을 좀 더 뒤로 넘겼다.
< 10월 28일 아침, 난에 물을 주며>
“댄버스, 난초의 피는 꽃은 참 신비로워.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검게 물들은 풀잎 사이로 다시 붉은 꽃을 피우지. 어떻게 또 그럴 수 있었을까…”
난 이때 말을 끊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난 너무 확신에 차 있었다.
“마님과 닮았습니다.”
“나와 같다고?”
“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고귀한 아름다움으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실 테니까요.”
“난초가 나와 같다… 난초가 나와 같다… 이 난초가 레베카와 같다라…”
그 날 이후 난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난초를 매일 정성스레 가꾸었다. 분명히 이것은 내게 있어서 ‘가짜’가 아니다.
< 1월 13일, 그림자도 없는 어두운 밤>
잭 파벨이 또 찾아왔다. 주인님이 알지 못하게 이 남자를 데려가는 게 오늘 밤에 마님이 내게 시키신 일이다. 이 능청스러운데다가 멍청하고 품위까지 없는 남자가 마님의 사촌이라니,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도 이리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방에 들어갔을 때 마님은 계시지 않았다. 하녀 하나가 저택 뒤 편의 창고에서 주인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그곳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 것인가는 뻔하지만, 결과가 달라지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다. 아니다! 막심 드 윈터는 마침내 오늘 밤 오만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음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의 레베카가 ‘진짜’ 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또한 불쌍한 남자란 말인가? 방에 다시 돌아오니 잭이 레베카의 보석함을 뒤지고 있기에 호통을 쳤다. 그는 처음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당황했지만, 이내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잭!! 다신 마님의 물건에 손 대지 마십시오!”
“이봐 이봐 그리 화내지 마. 사실 이 정도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누가 뭐래도 그 드 윈터 부인이니까 말이야.”
“흥, 마님께선 당신 같은 작자가 결코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이상해. 전부터 널 보고 있으면 오직 자신만이 레베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단 말이지.”
“마님은, 레베카는 어릴 때부터 그녀를 모셔온 내가 가장 잘 알아. 온갖 바보 같은 남자들이 그녀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녀의 진짜는 오직 나만 알고 있어.”
“그래. 넌 어릴 때부터 항상 레베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 마치 그녀의 그림자처럼. 그런데 이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 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녀는 어디에 있지?”
이 뒤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거의 다 찢겨져 버린 페이지이거나 기록 그 마저도 남기지 않았었다. 남겨진 것은 마지막 날의 기록이었다. 그 날이다.
<또다시 안개가 아주 짙은 날>
난 결국 드 윈터 부인 행세를 하는 가짜를 막지 못했다. 맨덜리의 언덕에서 들려오는 레베카의 비명은 막심을 황폐화 시킬 수 있었지만 옆의 그 계집까지는 흔들지 못했다. 내가 졌다. 막심과 가짜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 막심은 기고만장해 자신이 승리했다 생각했겠지. 옆에 붙어있는 그 년은 마침내 완전히 자신이 진짜 부인인 것으로 행세를 하게 될 거야. 그럼 레베카는? 그녀가 돌아올 자리는? 난초에 다시 피울 꽃은?
난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프랭크와 같이 모든 걸 털어 놓을 수 있는 집사도,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분신도. 그럼 나는 뭐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 치던 나는 탁자를 밀어버렸고 난을 심어 둔 화분을 깨트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모든 걸 되돌려야 한다며 깨져버린 조각을 미친듯이 잡기 시작했다. 선혈이 흘러내렸다. 난 잠시동안 지키지 못한 생명을 끌어 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난 마침내 그 순간 강렬히 피어난 생명을 보고 만 것이다!!!
아아…. 붉은꽃봉우리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여기 살아 계셨군요…
난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하녀들에겐 있다 설명해줄 테니 전부다 저택에서 나가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 했다. 난 그녀를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 앞에 심어주었다. 이제는 내 마지막 소명을 다할 시간이다. 난 그녀의 숨결이 닿았던 모든 공간을 지울 것이다.
맨덜리 자체가 가짜였던거야. 파도가 세게 치던날, 안개가 짙게 드리운 날까지. 처음부터 진짜와 가짜가 없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