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함이라
지난주, 드디어 내가 사는 동네에도 벚꽃이 폈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에서 밑에 지방에 사는 친구들이 올리는 꽃사진으로 만족했는데, 드디어 내 눈앞에도 벚꽃길이 드리워졌다. 출근길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벚꽃이 싱그럽다. 지하철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 앞에 있는 횡단보도에 들어온 파란 신호등을 보면서도 걸음을 멈추고 꽃 사진을 찍는다. 아침에 찍는 꽃 사진이 가장 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긴 겨울을 지나 새 생명을 틔우고 포근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봄처럼, 지난밤을 견디고 활짝 펼쳐진 꽃잎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머금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점심시간에 제대로 된 산책을 한 게 언제인지 싶어 오늘은 점심을 밖에서 해결하고 남산골 한옥마을을 산책했다. 지난 가을부터 점심시간에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됐을 땐 헬스장에 나가진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서 산책은 꿈도 못 꿨다. 거리두기가 완화된 이후에는 그새 피어난 게으름으로 운동은 고사하고 편의점 샌드위치나 오트밀 같은 부실한 식단으로 사무실에 앉아 식사를 때웠다. 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그것들을 먹고 나면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만졌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날은 풀렸고, 봄은 다가오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산책이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 곁으로 열심히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벚꽃 뒤로 보이는 한옥 건물들이 조화로워서 사진이 참 예쁘게 잘 나왔다. 보정 없이도 색감이 몹시 좋아서 자연은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아른아른하게 떨어지는 꽃잎이 옷자락에 닿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꽃처럼 연약한 생명도 없는데, 사람들은 꽃을 약하다고 함부로 뜯거나 짓밟지 않고 소중히 대하는구나’ 새삼스러울 것 없는 생각인데도 공원을 걷는 내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무지 많았다. 아마도 대부분은 근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일 텐데, 그 삭막한 사람들조차도 꽃을 보면서는 웃고 있었다(혹은 삭막하기 때문에 웃고 있었을지도). 누구도 엄벙덤벙 꽃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예쁘다, 좋다, 곱다 같은 말들을 연발하며 사진을 찍고 꿀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자리에 멈춰 서서 꽃에 웃음 짓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웃음이 꽃보다 더 꽃 같았다고 생각했다면 조금 억지스러우려나.
꽃처럼 한없이 연약한 생명도 없을 것 같다. 시기가 되면 피어나 잠시 모양을 유지하다가 사라지는 존재. 누군가 실수로라도 밟으면 짓이겨지는 가엾은 존재. 조금만 힘주어서 만져도 톡 하고 떨어지는 힘없는 존재. 그렇지만 긴 기다림 끝에 피어나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 일상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는 존재. 실존함으로 누군가의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드는 존재. 우리가 꽃을 함부로 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인하기만 해보이는 사람도 인간이기에 갖는 불완전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를테면 병에 걸린다든지, 사고를 당한다든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는다든지와 같은 것 말이다. 인간이 가진 연약함은 자신이 한없이 낮은 존재, 나약한 존재가 될 때 드러난다. 말하자면 극한의 상황이랄까. 벌써 1년 넘도록 우리를 구속하는 지긋지긋한 감염병 앞에서 우린 얼마나 무기력한지. 그럼에도 우리가 견디는 이유는, 이 어려운 상황의 끝에서 찬란하게 빛날 우리의 모습을 은연중에 모두 알고 기대하기 때문 아닐까. 1년의 기다림 끝에 무엇보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잠시일 뿐이라도.
그렇게 피어난 꽃은 외양은 연약할지라도 기다림이라는 연단으로 다져진 단단함이 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고상함이 있다. 외견도 아름답지만 오래 참음 후에 잠시 화려하게 피어나는 내적 찬연함이 그득하다. 그 눈부신 단단함은 스스로를 존귀한 존재로 세우고 있으리라.
그 많은 사람들이 꽃을 보며 웃음 짓는 까닭은 무의식중에 느끼는 그 고상함 때문일 거라고, 구태여 결론지어본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남은 산책로를 마저 걸었다. 사박사박 걷는 중에 보이는 꽃나무들이 새삼 포근했다. 그러니까 꽃처럼 살고 싶다고, 화려하게 피어날 자신만의 시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살아가고 싶다고 마스크로 가려진 입으로 슬쩍 중얼거렸다. 볕이 좋아 걷는 맛이 달큰했던 시간, 꽃은 그렇게 다가왔다.
당신도, 나도 꽃과 같은 인생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