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 빚어지는 웅장함
지난 주말은 비가 굉장히 많이 왔다. 쏟아지다시피 했다고 표현하면 썩 정확할 것 같다. 꽃이 핀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맞이하는 봄비는 달갑다가도 떨어지는 꽃잎에 못내 아쉽다. 하지만 봄비가 꽃잎을 떨어트리는 데 일조한다고 해서 미움을 받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다. 꽃잎은 질 때가 되면 자연스레 지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이파리들이 돋아난다. 꽃잎을 떨어트리는 봄비는 그 이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생명을 공급한다. 그렇게 1년 중 산록이 가장 아름다운 5월, 무르익은 봄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세상이 완성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쏟아지는 비를 뚫고 혜화까지 갔다. 오늘은 뮤지컬 ‘명동로망스’를 관람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명동로망스’는 매너리즘에 빠져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공무원이 타임슬립으로 1956년의 로망스 다방에 닿게 되고, 이곳에서 만난 예술가들과 생활하며 펼쳐지는 뜨거운 이야기이다. 처음 줄거리를 봤을 때는 소재가 어쩐지 (건방지게도) 유치하게 느껴졌다. 타임슬립이라니! 내가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시절 생각해 냈던 소재가 바로 타임슬립이었다. 그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건너가는 그 우주적으로 뻘쭘한 장면을 어찌 표현할지도 궁금했다(나는 그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을 도저히 쓸 자신이 없었다).
관람을 마치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뮤지컬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소재에 대해 오만한 걱정을 하던 과거의 나는 이미 우주 밖으로 내던졌다. 이렇게 가슴 뛰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더 간절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얼른 집에 가 노트북 앞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영혼을 불태워 글을 쓰고 싶다는 다소 오글거리는 생각도 마구 솟구쳤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극의 후반부로 넘어가며 1956년의 예술가들은 매너리즘의 공무원에게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묻는다. 당연히 그의 대답은 ‘그런 거 없다’였다.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기에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예술가가 아닌 사람에게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번쯤은 그려본 이상적인 세계. 자신의 가치관이 듬뿍 담겨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그런 곳. 가슴이 두근거리는 매 순간 설레는 곳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세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주인공인 공무원처럼 오늘 하루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고, 퇴근 시간을 바라며 주어진 업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또는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공연 중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 훔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슬쩍슬쩍 들려오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위해 목숨뿐 아니라 영혼까지 갈아 넣는 예술혼은 이제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게 되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최대한의 안정과 최적화된 시스템을 요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너무 잘 적응했으니까. 주식을 하며 잠시 웃고, 다니는 직장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이리저리 투잡, 쓰리잡을 뛰는 모습은 역동적이면서도 삶을 향한 간절함 몸부림 같아서 퍽퍽하기 그지없다. 그렇지. 당장 오늘, 이번 주 앞가림하기도 힘든데, 올 거라는 보장도 없는 세상은 꿈꿔서 뭐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공연이었다. 지금도 가만히 곱씹어보며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그 열정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이곳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듯,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고 마주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를 너무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겨우 하루를 버텨내려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같은 결로 우리는 결코 잊혀진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갖지 못한 건, 또는 찾지 못한 건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본인이 못나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 세계를 지켜주지 못한 이전 세대 어른들의 과오일 뿐이다. 우리는 그 과오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 세계를 일으킬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과감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연 중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흘렀던 것은, 주인공이 결국은 자신의 세계를 찾았다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였을 것이다. 두려울 것 없다. 우리의 걱정은 있는 사실보다 훨씬 부풀어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현실을 생각하기보다는 현실로 나아갔으면 싶다. 당신이 지닌 삶은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만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웅장할지도 모른다. 봄비를 맞으며 잠시의 화려함을 벗어 던지고 자연의 조화 속에 더 찬란한 산록으로 모습을 바꾸는 수많은 나무처럼 말이다. 정말,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다.
좋은 날이다. 봄비는 새 생명을 틔우고, 어느 공연은 한 사람의 사그라들던 글에 대한 간절함을 깨웠다. 삶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해답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 어느 선택을 하던 그곳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나. 살아가는 진 재미는 거기에 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