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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Apr 08. 2021

가장 작지만 가장 경이로운 세계

지금을 함께 살고 싶은 이야기

언젠가 어린이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얌전한 남의 집 아이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고약한 발상을 할 수 있나 싶지만, 그땐 지금보다 더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무신경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이를 고작 관망의 대상으로 여겼다니. 그것도 ‘얌전한’으로 축소시켜서. 차별과 혐오를 동시에 했다니. 쥐구멍이 어디 있나 싶다.


어린이에 대해 '제대로 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비건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비건은 지금 거의 포기 상태이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으로 비건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벌써 이상기후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기후변화를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미래에 내 자식은, 우리의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더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아이들이 우리의 무신경과 부주의로 빚어진 상황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생각을 하니 내 주변의 아이들에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수많은 아이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부터인 것 같다. 책임감 있는 진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대체로는 기분 좋은 흐뭇한 웃음이었고, 귀여워 죽겠는 탄성이었다. 이따금씩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이 책을 펼치고 있는 동안 죽 웃고 있었다. 서서히 성장하며 변화하는 상황과 환경, 기대와 가치에 적응하느라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까닭이다.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나 역시 겪고 지나온 세계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그 세계는, 참 맑았다.


어린이라는 존재만이 가지는 티 없는 순수함은 바라만보아도 나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물론 더 이상 아이를 구경하는 저차원적인 행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공간에 있는 아이의 맑은 세계를 감각해보는 것이다. 한 공간에서 어린이가 느끼고 말하고 질문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좇아 따라다닌다. 어린이의 세계를 더 알고 싶어서. 그 세계를 알면 지금보다 더 잘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고작 이렇게 글이나 쓰는 정도이지만, 그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면 좀 더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왜 우리는 어린이들의 세계를 지켜주지 못할까. 다가올 앞날을 준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도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간다는 걸 너무 쉽게 간과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어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 지금 주어진 어린이의 현재라는 시간이 너무 베재되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은 미래를 위한 암흑기가 아니라 살아 있음으로 빛나야 하는 시기이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우리는 지나온 시절을 너무 쉽게 망각해 지금 어린이들의 시간을 가볍게 여기진 않나, 무겁게 돌아본다.


그러한 통제는 어린이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왜 이 나라 교육은 아직도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걸까. 일하면서 본 원고에서 ‘인재 양성’이라는 말을 접한 적 있다. 대학교 광고에나 들어갈 법한 이 말이 붙은 곳은 초등학생 코딩 조기교육과 관련된 지면이었다.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미래를 이끌어갈 자원으로 보는 것은 가히 야만적이지 않나. 이 관점은 '능력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존재이다'로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그것을 힘써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지식인이라니. 아이들마다 각자 만들어나갈 근사한 세계에는 아무 관심 없는 이 현실이 먹먹하기만 하다. 어른들이 길을 열어줘야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는 그 오만함이 아이들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쯤이나 깨달을까.


부디 이 책과 현실을 떨어트려 생각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줄 수 있는 어른스러움, 처음이고 익숙하지 않기에 느린 어린이를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 힘으로도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어린이를 이길 수 있지만, 기꺼이 져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들에게 배우려는 지혜. 이 모든 것은 어른들의 현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각자의 세상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들이 성장해 스스로의 세상을 완성할 때 그것이 얼마나 근사할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당신이 지금 지니고 있는 세계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가 그랬듯 아이들은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의 세상과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위대하고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힘이 분명히 있다.


지금부터라도 아이와 마음을 나누며 교감하고 싶다. 책을 펼쳐 들 때 떠올랐던 웃음을 잃고 싶지 않다. 어린이를 보며 웃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과 어린이지만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뽀르뚜까가 기꺼이 제제의 친구가 되어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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