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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은 Nov 24. 2024

상처를 허락하지 않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매주 편지를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키고자 책상에 앉았어. 오늘따라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엄두가 나지 않네. 그 무렵의 네가 여기기엔 사소하고 흐릿해졌을 날들이 내겐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날일테니까, 가끔은 그 하루가 너무 힘겨울 때가 있더라. 그리고 오늘이 내게 그런 날이네.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또다시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고 지나가야 하는 그런 날.


생각해 보면 살면서 감당할 수 없던 감정에 오래 허우적대던 순간들이 있었어. 아픈 것을 처음 알게 된 날도 그랬고 처음 마음을 준 사람과 이별을 하던 날도 그랬지. 얼마나 빨리 나올 수 있냐의 차이일 뿐 모든 감정은 날 영원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 알고 있지?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고 양산해 내는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어떤 일로 상처를 받을지 아닐지, 슬퍼할지 슬퍼하지 않을지는 오직 내 마음이 정하는 것일 테니까.


이번만큼은 더 이상 예전에 했던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기로 했어. 그 누구도 미워하지도 숨 막혀하지도 않기로 했지. 결국 바닥까지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이 다칠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원래부터 없던 일, 없던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그냥 나를 좀 더 확인하고 배워갈 수 있는 계기 정도로만 남겨두기로 했어. 상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일 테니까. 슬퍼할 만큼 슬퍼했으니 모든 것을 끊어내고 지우고 나아가기로 했어. 더 감정을 낭비하기엔 내가 너무 사랑스럽고 애틋하니까 그 이상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아. 작은 파도들 때문에 스스로가 바다임을 잊지 말자.


난 언제나 그랬듯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어. 사랑에도, 일에도, 내게 주어지고 지나가는 모든 바람과 햇살, 눈보라를 맞는 일에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한순간도 나답지 못했다면 그게 바로 후회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애초에 후회를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지난날들에 몇 가지 후회가 있고 그것들은 오랜 시간 잘 잊히지 않더라. 이제는 삶에 더 이상 후회를 남가지 말자.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해로운 이기심에 더 이상은 같이 흔들리지 말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난 무엇을 사랑한 걸까 싶어. 깊게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을 사랑한 건 아닌 것 같아. 그저 아플 때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좋았고 재밌는 순간들만이 신났던 거지 상대를 진짜로 사랑한 건 아니었어. 반대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날 불안하고 애타게 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들을 사랑으로 애써 착각하지 말자. 편하던 상태로 돌려놓고 싶은 욕구일 뿐일 테니까. 사랑은 빛나는 모습과 순간만 공유하는 것이 아닌 힘든 모습조차도 안고 같이 진흙탕물에라도 빠지고 싶은 그런 유의 것일 테니까.


앞으로 진짜 사랑이 올 거야. 어떤 문제도 같이 의논하고 헤쳐나갈 수 있고 든든히 곁을 지키는, 깊은 대화를 해도 불편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사람. 결이 맞는 사람. 지금 네 곁에 있을 바로 그 사람. 그때까지 난 차디찬 겨울을 나되 스스로를 상처받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모든 건 오늘까지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이제 그만 없던 일로 지울 거야. 내가 그렇게 마음먹었으니까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난 생각보다 강하고 굳건한 사람인 거,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좋아하는 구절을 편지에 남겨두고 갈게. 그 시절의 너에게도 위로가 되길.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다음 주부터 여긴 눈이 내린대. 첫눈을 혼자 보겠지만 네가 함께한다고 생각할게. 사랑해.


11월의 문을 닫는 어느 밤,

사랑하는 네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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