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처음 편지를 쓴 게 봄인데 어느새 한겨울이네. 사람도 사계절을 모두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 꼬박 네 개의 계절동안 편지를 쓰면서 나는 스스로를 좀 더 알게 되었을까, 그 맘 때의 너는 이 시절의 나를 결국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야.
올해는 유난히 판타지 소설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았어.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일은 차치하고라도 드라마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 그중 가장 잊지 못할 일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었어. 알잖아. 그저 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건 그녀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그녀의 책으로부터 느낀 전율과 여운을 나만의 방식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작가의 책을 모두 읽었고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담은 글을 쓰고 싶어 했지. 처연하고 시리면서도 어느샌가 사랑을 얘기하던 문장들. 작가에게 나는 수많은 독자 중 한 명이겠지만 내게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야. 간절한 꿈을 가지게 해 줬다는 게, 덕분에 닮고 싶은 글이 넘쳐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그런 이의 글이 세계적으로 읽히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마치 나의 일처럼 기쁘더라.
어제는 그녀의 책을 주제로 독서모임을 했어. 원래도 유명했지만 문학상을 받고 이제 만인이 그녀의 책을 읽고 모임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오랜 팬으로서 벅찼지. 꼬박 세 시간을 밤늦게까지 책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 혼자만 간직하던 감상들을 마음껏 공유하고 타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지 전에는 알지 못했어. 모임에서 한분이 수상 당시 한강 작가님의 소감을 들려줬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늘 문학의 가치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그녀의 말들이 모든 답을 알려주는 기분이었어. 꼭 내 공간에 남기고 싶고 네게 들려주고 싶어서 전문을 남겨.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 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말대로 수많은 일인칭인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각각 고유하게 존재해.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 오롯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우린 온기를 나누고 폭력에 맞서며 인간이길 고집하지. 때론 아주 무용해 보이는 문학은 인간이길 포기하게 하는 것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대항일지도 몰라.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가의 말을 보면 유독 쓰고 싶은 건 결국 사랑이었다,라는 말이 많더라. 쓰는 사람으로서 공감해. 사랑이 유독 많은 사람들은 글을 쓸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인간일 수 없게 하는 이들을 미워하면서도 인간을 또 너무나 사랑하기에 어디서 누군가 겪을 불행, 폭력, 존엄하지 못한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나 봐. 그래서 쓸 수밖에 없나 봐. 나 또한 그런 가치를 쫓는 사람일 테고.
마지막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언젠간 내가 그녀의 글에서 얻은 위로와 해답처럼 누군가도 내 글에서 꿈을 찾고 살아갈 이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의 존재가치는 그곳에 있는 것이겠지. 네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깊은 생각으로 모두를 품어줄 수 있는 지극한 사랑의 글을 쓰고 있길.
12월 12일,
널 응원하는 네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