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다리미. 꽃가지가 분명히 다리미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 혜연은 서둘러 옷장 뒤에서 숨겨져 있던 새하얀 다리미를 찾아냈다. 다리미의 유난히 매끈하게 빛나는 열판을 보며 이걸로 뭐든 다려보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지 싶어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을 차례대로 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 다리미는 살짝만 스쳐도 작은 주름 하나까지도 구김 하나 없이 쫙 펴졌다. 평범한 다리미가 아니라고 확신한 혜연은 근처에 손에 잡히는 애꿎은 책 종이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다려 보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쓰고 있던 머리띠부터 앉아 있던 의자에도 다리미 판을 들이밀어보다가 손등이 데일 뻔한 혜연은 울상이 되었다. 도대체 꽃가지가 말한 봄은 어디 있는 거야? 아니, 애초에 봄을 다릴 수 있는 게 말이나 되긴 해?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어떡하지, 고민하던 찰나 또다시 이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꽃가지의 것보다 한층 낮은 목소리였다.
의자를 다리다니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다리미였다. 몇 시간 전에 꽃가지와도 말을 섞어본 혜연이었지만 사물과의 대화는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혜연은 놓칠 뻔했던 뜨거운 다리미를 간신히 잡아내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도대체 뭐가 봄인지 모르겠어.
그걸 왜 몰라?
시무룩한 혜연의 말에 다리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다리미는 무언가 아는 걸까? 혜연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리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바로 봄이잖아. 봄에만 살아있는 아이, 바로 너.
응? 나를 다리라는 말이야?
혜연은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뜨거운 다리미로 자신을 다리는 상상까지 하며 몸서리쳤다. 게다가 평범한 내가 봄이라니. 나는 그냥 봄에만 유난히 심장이 잘 뛰는 아픈 아이일 뿐인데.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한 혜연에게 다리미는 말했다.
봄의 아이야, 이미 봄은 영원해. 네게 영원한 봄을 선물하고 싶어서 우리가 너를 이곳으로 불렀으니까 네가 꿈에서 깰 때까지 이 봄은 끝나지 않을 거야.
다리미는 혜연에게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라고 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푸는 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표정이 있다면 상냥하게 싱긋 미소 짓는 얼굴일 것이라고 혜연은 생각했다.
다리미가 가리킨 쪽에는 새하얀 방 끝의 작은 금빛 문이 있었다. 혜연의 몸을 비틀어야만 간신히 나갈 수 있는 그런 자그마한 문이었다. 혜연은 다리미의 말대로 조심스레 다가가 손잡이를 당겼다. 천천히 문이 열리자마자 상큼한 봄내음이 혜연의 코를 찔렀다.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경치에 혜연은 잠시 숨이 멈췄다. 그 세상은 혜연이 짧은 생 내내 바라던 봄의 풍경 그 자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위, 샛노란 물결의 꽃들이 빼곡히 수놓은 그곳에서는 새들이 합창하듯이 노래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 따라 흩날리는 꽃씨들을 휘날리는 호수 위에 오리들이 여유로이 헤엄쳤다. 따스한 봄만의 온기 그리고 나뭇가지 끝마다 맺힌 봉오리들, 겨울잠을 끝낸 동물들의 개운한 숨소리, 수채화로 한 붓씩 정성 들여 칠한 듯한 새파란 하늘에 탄성을 내지른 혜연은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 발자국씩 들판에 놓인 길을 걸을 때마다 땅 위에 몸이 떠있는 듯한 들뜬 느낌에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뛰지 않아 생 내내 속을 썩이던 그것이 요동쳤다. 혜연은 너무나 사랑하는 봄을 힘껏 느끼기 위해 손바닥을 피고 눈을 감으며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을 가다 만난 벌 두 마리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봄의 소녀야. 오늘 기분은 어때?
혜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을 했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해.
네가 그렇게나 봄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벌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지만 콕 집어 하나만 답할 수 없는 혜연이 망설였다. 그러자 벌들은 자신만만하게 혜연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우리만 따라와. 보여줄게.
도착한 곳은 푸른 잔디 한복판의 야외 상영관이었다.
어서 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도착하자 다람쥐들이 혜연을 반기며 토끼풀로 만든 반지를 끼워주고 혜연만을 위해 준비한 의자에 앉혔다. 아주 큰 스크린 앞에 혜연을 위한 한 좌석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 모든 일이 어색해 그저 웃고 있는 혜연 앞에 사회자 무당벌레가 나타났다.
아아, 모두 집중해 주세요! 제1회 봄 극장이 재생됩니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겨울잠만 잤는지 몰라요. 하하!
곧 하나 둘 모여들었다. 나비 떼와 개구리부터 들곰까지 어디선가 잠에서 깬 목소리들이 하나 둘 울려 퍼졌다. 그 주변엔 새들이 둘러싸여 봄의 소녀가 드디어 나타났다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모두 혜연을 향해 인사를 했고 이곳에 무사히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지난 겨울동안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곧이어 모두가 잔디밭에 자리를 잡자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혜연이 봄 속에서 행복했던 나날들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창가에서 봄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 새싹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 혜연의 모습이 화면에 보이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가을에 뿌린 씨앗이 움을 틔우고 새싹이 나는 기회를 주는 이 계절은 언제나 공평했어, 그래서 내가 봄을 사랑했지, 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태어나고 시작된다는 느낌은 언제나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로도 벅차곤 했다.
그다음은 엄마 아빠의 손을 나란히 잡은 봄소풍날로 넘어갔다. 움츠렸던 겨울을 지나 기지개를 켜고 바깥으로 첫나들이를 가던 기분이 떠올랐다. 매계절 찾아오는 봄이 당연하던 혜연의 어린 날엔 그만큼 가족의 존재도 당연했다. 곁에 언제나 있을 것이라고 믿던 그 순간엔 서로로 인해 눈물짓는 날은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혜연이 온전히 나머지 계절을 살아내지 못했을 때 오랫동안 불행해 보였던 그 두 사람만 생각하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듯이 먹먹해졌다. 혜연이 울먹이자 무당벌레가 화면 뒤에 무언가 지시하더니 곧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친구들과 하교 후 강가에서 놀던 봄날들이 한참 방영되었고 환호성 속에 한봄의 소풍은 계속되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날이 아니에요! 오늘은 영원한 봄을 즐겨요!
개구리들이 연꽃잎이 수놓아진 음료수들을 날랐고 모두 혜연의 기억을 자신의 것처럼 즐겼다. 어깨 위로 살랑이는 봄바람도 모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혜연이 봄을 사랑하는 이유의 개수만큼 그 기억들도 오래 재생되었다. 혜연은 어느새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하나 둘 그 기억들에 빠져들어 울고 웃었다. 어느새 이 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인 무당벌레는 다음 순서를 소개했다.
오늘을 준비하느라 모두 고생했지만, 꽃가지의 공이 아주 크다는 건 모두 알고 있겠지요? 혜연 양을 위한 축사를 준비했다고 하니 우리 한번 들어봅시다. 모두 큰 박수를 주세요!
곧이어 꽃가지가 나타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다소곳이 인사한 꽃가지는 마이크에 대고 말을 시작했다.
봄의 아이야, 오늘 어땠어? 너를 위해 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준비한 거야. 네게 영원한 봄을 한 순간이라도 선물하고,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
그렇게 시작한 말은 얼마 남지 않은 혜연을 위해 그들이 작당모의를 벌여 마지막 선물을 해주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어쩌면 혜연은 다리미의 말부터 직감했다. 봄을 영원히 늘릴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고. 이들이 자신을 위해 어떤 아름답고 슬픈 어떤 작당모의를 했구나, 하는. 영원할 것만 같던 봄은 오로지 자신의 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얼마 남지 않은 혜연을 위해 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작당모의를 벌여 마지막 선물을 해주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혜연은 축축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봄은 유한하잖아. 모든 건 유한해서 아름다운 거거든. 네 삶도 그래.
꽃가지는 조금은 안쓰러운듯한 음성으로 울먹이는 혜연을 위로했다. 삶은 길어서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길고 추운 겨울을 버티며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짧은 찰나가 너무나 소중해서라고. 네 삶은 불행한 게 아니라 봄처럼 반짝 빛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그런 말들을 해주었다. 혜연의 투명한 피부 위로 눈물이 흘렀다.
기억해. 네 짧은 삶은 유한하고 빛나는 봄 그 자체였어.
혜연은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봄을 누구보다 사랑하던 마음이 떠올랐다. 봄이 아니라 나머지 계절도 살아내고 싶었다. 봄의 아이라는 건 누가 정해서 나를 이렇게나 힘들게 하는지. 자꾸만 마음이 아파왔다. 봄을 누구보다 사랑해서 봄의 아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꽃가지는 혜연의 생각을 읽을 수라도 있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뭐래도 네 삶은 뜻깊었어. 너는 봄에만 살아 있던 게 아니라, 봄을 유난히 사랑한 거야.
그곳에 있던 모두가 혜연에게 꽃 한 송이씩을 건네주었다. 어느새 품에 가득 꽃다발을 껴안고 있을 때 깨달았다. 그녀 자신은 모든 시작의 순간을 사랑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봄부터 겨울을 대비하지 않듯이 언제나 이별과 끝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봄이 짧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더라도 그 행복한 순간을 마음 깊이 감사했다. 이 순간도 그랬다. 자신을 위한 한봄의 작당모의가 얼마나 아름답고 충만한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토록 바랐던 영원한 봄을 살았고 그런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전에 없을 정도로 고요해 평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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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환한 빛이 비쳐 얼굴을 찡그렸다. 곧이어 초점을 찾으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곧이어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에 서서히 초점이 맞춰지고, 정신이 드냐는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자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병원이었다. 꿈을 꾸는 사이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묻고 싶은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은 눈이 자꾸만 감겨 천천히 눈을 떴다 감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고 있는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그새 몰라보게 상한 얼굴에 마음이 아팠다.
혜연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친구들이 준비해 준 영원했던 봄 덕분에 더 이상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 건 이 얼굴들이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딸을 자신보다 일찍 보내야 할 이들의 마음들. 수백번 준비했어도 막상 닥치면 세상이 무너질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이들에게 혜연은 너무나 미안했다. 혜연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 꿈을 꿨어.
어떤 꿈? 혜연아? 정신 차린 거야?
아빠는 놀란 얼굴로 혜연에게 말했고 누군가 의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주 찬란한 꿈이었어. 봄을 선물 받았거든. 그러니까 나 아쉽지 않아. 정말 괜찮아.
너무 좋은 꿈을 꿨구나, 우리 혜연이.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행복했어 덕분에.
숨이 가빠 혜연이 아주 느리게 말했다. 그러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눈물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들은 혜연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제발 들어달라는, 마지막까지 가져가달라는 간절한 속삭임이었다.
엄마도 고마웠어.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정말 너무 고마워.
혜연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알고 있지? 다음 생에 또다시 만나자. 그때는 봄처럼 짧게 머물지 말고 오래 있어줘, 응?
떨리는 목소리들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이제 앞이 아주 흐리게만 보였지만 마지막으로 그들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응, 꼭 그럴게. 마지막으로 웃어줘. 부탁이야.
두 얼굴에 애써 마지막 미소가 띄어 올랐을 때 혜연은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비로소 고요해졌을 때 귓가에 어떤 음성이 들렸다. 네 덕분에 우리들의 봄은 아주 길었어. 어쩌면 영원하겠어. 누구보다 봄을 아껴줘서 고마워. 혜연은 희미하게 웃었고 영원한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봄의 작당모의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