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에 호박 모양 사탕바구니를 쥔 아이가 복도를 달린다. 10월이 끝나가는 어느 저녁, 대명아파트 201동 7층 복도를 달리던 아이는 맨 왼쪽 집의 초인종을 향해 닿지 않는 손을 힘껏 뻗는다. 총 8세대가 나란히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는 작은 복도식 임대아파트에서 듣기 어려운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보통 출근길의 한숨 소리, 혼인 신고를 미처 하지 못한 젊은 부부의 높은 언성, 삶에 지친 부모의 한탄과 그들에게서 자라난 아이들의 떼쓰는 말들이 문 틈을 삐져나와 복도를 울리곤 한다.
간신히 벨을 누르는 데 성공한 아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누군가의 응답을 기다린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멜빵바지를 입고 수북한 앞머리에 눈이 살짝 가려져 있다. 아이의 엄마가 우리 지호 머리 너무 길었다, 얼른 머리 자르러 가야지, 해도 늘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탓이다. 그렇게 머리를 자를 타이밍을 놓친 후 704호에 이사를 온 지 나흘이 된 날, 아이는 701호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텅 비어있지만 사탕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상상하면서, 얼른 채워서 우리 엄마 오면 나눠줘야지, 생각하면서.
이 밤에 대체 누구야, 툴툴대며 문을 연 701호 젊은 여자는 자신의 짧은 잠옷바지 높이쯤에서야 시선을 맞추고 있는 작은 지호를 보고 놀란다. 어머, 애야, 웬일로 왔니? 묻자 지호는 사탕 바구니를 내민다. 오늘은 할로윈, 아이들이 사탕을 받는 날이에요,라는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 와중에 안에서는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누구야? 집주인이면 월세는 다음 주에 어떻게 해서든 준다고 해. 남자의 음성은 사뭇 거칠고 어둡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웬 아이가 와서는 할로윈이라고 사탕을 달라네. 여기 봐봐. 너무 귀엽게 생긴 아이야. 며칠 전 이사 온 그 집 애인가? 여자는 지호의 앞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가만있어봐, 사탕이 있던가?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밖에 나와본 남자는 혼잣말로 이런 건 외국에서나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사탕을 달라고…, 혼잣말하며 지호를 흘긋 쳐다본다.
여자는 집구석 어딘가 있던 청포도맛 알사탕 두어 개를 기어코 찾아내 지호와 눈높이를 맞춘 후 바구니에 넣어준다. 이름이 뭐니? 박지호요. 지호구나. 엄마 아빠는? 엄마 아직 집에 안 왔어요. 일하러 가셨구나? 그럼 이 시간에 보통 혼자 있어? 네에. 며칠 전 이사 온 집 맞지? 원래는 어디 살았어? 저 멀리 미국 살았어요! 풀 죽어있던 지호는 갑자기 신나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의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밥을 네 번은 먹어야지만 도착하던 곳에 잠시 살았어요. 살면서 최고로 행복했어요. 처음엔 아빠도 우리 집에 같이 살았어요. 어느 밤부터인가. 엄마랑 아빠랑 밤마다 방에 들어가서 지호 몰래 싸웠어요. 엄마는 그런 밤마다 저를 안고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하며 울었어요. 안 울었다고 하는데 지호는 다 알고 있어요. 엄마가 다시는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사탕들도 받아서 엄마 오면 줄 거예요. 그런 말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701호 여자는 슬픈 이야기를 해맑게도 재잘대는 지호의 이야기를 가만히 웅크려 듣는다. 늘 그랬듯이 불행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지호야, 우리 옆집에도 사탕 받으러 갈까? 아이의 조막만 한 손을 붙잡고 나가려 하자 남자가 붙잡는다. 밖에 추워. 아무리 잠깐이래도. 뭐라도 걸치고 다녀와. 그도 주방에서 지호의 이야기를 짐짓 듣고 있던 모양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말투의 온도가 따스해졌다. 여자는 정말 오래간만에 미소를 띠고 그와 눈을 마주친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지호의 엄마 아빠처럼 언성을 높였던 그들은 그랬던 적이 없다는 듯이 대화를 나눈다. 오르는 대출 금리나 밀린 월세 같은 것들은 사랑을 녹슬고 닳게 한다. 석 달째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구인광고나 들여다보는 남자는 스스로에 대한 무기력함을 여자의 탓을 하고, 여자는 초라해진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모든 걸 날 서게 반응하던 기억들…. 언젠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아직 없어서 참 다행이야, 이 꼴을 보았으면 어떤 아이로 컸을까 생각하던 시간들. 그것들은 눈앞에 참 사랑스러운 지호를 보자 모두 녹아내린다. 불안은 어른들의 것이여만 하는데, 맑고 투명한 수채화 같아야 할 아이가 이렇게나 철이 든 것을 보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금방 다녀올게, 말하고는 지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바로 옆집인 702호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한참을 기척이 없어 그 옆집으로 가려고 하는 찰나에 문이 열린다. 거기 누구요. 자다 깬 듯한 노인의 음성이 들린다. 발걸음을 머문 지호는 그를 보더니 와락 달려가 안긴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엄마도 보고 싶어 했어요! 노인은 당황한 듯이 자신에게 안긴 아이 쪽을 주섬주섬 만진다. 초점이 없는 눈은 그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또렷하게 보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여자는 일 년이 넘게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방금 깨닫는다. 한 번도 누가 옆집을 드나드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은 적 없는 걸 봐서는 혼자 지내는 할아버지겠지, 생각한다.
여자는 반가워하는 아이에게 지호야, 아는 할아버지야? 묻는다. 지호는 우리 할아버지예요, 엄청 오랜만에 봐요,라고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 손주는 여기 없다. 이미 다 커서 외국에서 학교 다니고 있단다. 너는 누구니? 묻자 지호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유심히 본다. 이내 실망한 눈빛으로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네, 하며 뾰로통해진다. 여자는 영문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704호에 애기 엄마랑 애기랑 이사를 왔는데 사탕을 달라고 하지 뭐예요. 외국에서는 이맘때쯤 되면 그런 문화가 있다나… 이 김에 서로 인사도 하고 좋죠, 뭐. 저는 옆집 살아요, 할아버지. 그러자 노인은 시끄럽던 그 집으로 구만. 남편이랑 그만 좀 싸워. 다 들려…. 말한다. 한순간 얼굴이 붉어진 여자는 죄송해요, 할아버지는 혼자 지내시는 건가요? 하고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은 암흑처럼 까맣고 도무지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다. 노인은 아무 대꾸하지 않는다. 머쓱해진 여자는 지호에게 다른 집으로 가자, 말하는데 노인이 별안간 막는다. 어디 알사탕이라도 있을 거야, 오래전에 있던 것 같은데… 잠깐 들어와 보라고 손짓하며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인다.
암흑 같은 집에 초대된 여자와 아이는 조심스럽게 현관에 발을 디딘다. 불 켜도 되죠, 할아버지? 라 묻는 동시에 여자는 불을 켠다. 불을 켜자 소파 하나와 탁상 하나, 라디오 한 대가 고작이다. 지호는 늦은 저녁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신이 난다. 오늘 밤은 할아버지를 닮은 옆집 할아버지와 사탕을 준 친절한 누나까지 함께일 테니까. 밤늦게 지친 표정으로 들어와 놀아주지도 않고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엄마의 지친 얼굴이 스친다. 아직 엄마가 오려면 두어 시간 정도 남았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소파에 앉으라 권한다. 그리고 주방 서랍에서 부스럭거리며 사탕을 찾는다. 결국 누룽지맛 사탕 하나를 찾아 지호에게 건넨다. 지호는 신난 표정으로 자신이 가져온 호박 모양 바구니에 넣는다. 여자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집에 뭐가 너무 없어 보이는데. 그냥 대충 때우지 뭐.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할아버지의 표정엔 빛이 꺼져가는 무언가가 스친다. 어머, 어디 편찮으세요? 여자가 화들짝 놀라 묻자 이 나이 되면 멀쩡한 데가 없지. 적당히 살다 가야지, 라며 할아버지는 쓸쓸히 답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호는 할아버지 눈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다. 꼭 오래 살던 미국 집을 떠나던 그때의 엄마의 눈 같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작 짐가방 하나와 지호의 손만을 붙잡은 채 그 집을 나오던 엄마는 몰래 울고 있었다. 지호는 그날 이후로 결심했다. 평생 꼭 옆에 붙어 엄마를 지켜줘야겠다고.
가만있어봐, 저녁은 드셨어요? 여자가 일어서며 말한다.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본다. 반쯤 잘린 가지와 언제 사놓은 건지 썩어가는 복숭아뿐이다. 선반을 열어보지만 컵라면 몇 개와 통조림이 전부다. 심지어 유통기한도 지났다. 여자는 아버지 생각이 난다. 직업도 변변찮은 놈이랑 살 바엔 나가라는 말에 집을 나온 지 수년이 넘었다. 그땐 분명 사랑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면 아버지 말이 다 맞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처음과 달라진 말투와 높아진 언성이 언뜻 들리는 것만 같다. 불어나는 빚에 사랑도 빛바랐다. 그 시절엔 분명 그도 날 사랑했을 텐데, 그 사실은 분명한데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지.
여자는 지호에게 말한다. 안 되겠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우리 장 봐와서 같이 밥 해 먹자. 지호도 배고프지? 지호는 똘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맛있는 거 해주세요, 한다. 할아버지는 그런 지호의 음성을 듣고 희미하게 웃는다. 할아버지, 잠깐만 계세요. 저희가 뭐라도 사 올게요. 문 열어주셔야 해요. 여자는 지호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가며 신신당부를 한다. 할아버지는 귀찮게 됐대도, 하면서도 싫지 않은 내색이다.
복도로 나온 여자는 핸드폰을 열어 은행 어플을 켠다. 잔고를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오만 원 언저리의 금액이 찍힌다. 10월 말일이니 내일이면 돈이 들어올 것이다. 자신이 매일 낮마다 캐셔로 일하는 마트에서 매달 1일에 월급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돈으로 이 아파트의 월세, 관리비, 두 사람의 식비를 충당하고 있어 매달 허덕이지만 괜찮다. 헤프게 벌써 돈을 다 어디다 썼냐는 남자의 타박을 들을 각오도 되어있다. 지금은 이 두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서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의 이유를 모두 다 명확히 알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자는 지호와 함께 자신이 일하는 마트로 향한다. 아이는 아직 작아서 걸음이 느리다.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본인과 남자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젓는다. 두 사람도 버거운 이 형편에 차마 예상되는 불행을 물려줄 수 없다. 사랑만 받아야 마땅할 아이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그 사랑도 괜한 원망으로 변할까 봐 불안하다. 곧이어 마트에 도착한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직원들에게 옆집 아이라며 지호를 소개한다. 지호가 붙임성 좋게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모두 흐뭇하게 웃는다. 그러곤 마트 직원들은 지호가 든 사탕바구니에 사탕을 너나 할 것 없이 넣어준다. 어느새 사탕바구니는 든든하게 무거워진다.
쌀 조금과 가지, 복숭아 세알을 산다. 미역과 국거리용 고기도 산다. 다 합치니 계좌에 있는 돈과 계산대에 찍힌 숫자가 아슬하게 맞춰진다. 오늘 뭐 좋은 일 있나 봐? 말하는 동료 캐셔 언니 말에 할로윈이잖아요, 답한다. 언제부터 그런 거까지 챙겼다고? 오늘부터요. 둘은 새삼스럽게 자지러지며 웃는다. 아무 걱정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웃는다. 지호도 두 사람을 보며 해맑게 웃는다.
발걸음을 서둘러 할아버지네로 간다. 초인종을 누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할아버지가 나온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밥 해드릴게요. 말하고 여자는 부엌으로 간다. 미역국을 냄비 한가득 끓이고 가지를 무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금방 뚝딱 요리를 하고는 거실에 상을 편다. 그동안 지호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오늘 하루 받은 사탕을 하나, 둘 센다. 여자가 밥과 국을 퍼고 반찬을 놓자 세 사람은 밥을 먹는다.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이도 있어서 간을 약하게 했어요, 여자는 쌀밥에 미역과 고기를 올려 지호의 입에 넣어주며 말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가 밥 한 숟갈을 뜨면 위에 가지무침을 올려준다. 세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한다. 다 먹고 상을 접자 할아버지는 말한다. 이런 밥이 얼마만인지. 맛있네, 참 맛있어. 그 말에 여자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신의 마음을 할아버지가 볼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으리라 믿으면서.
다 먹은 접시를 치우고 여자는 달그락대며 설거지한다. 그건 내버려 두래도, 나중에 복지사 선생님이 오시면 해주신다고 번거롭게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여자는 소매를 걷히고 빨간 고무장갑을 껴며 이깟거 금방 해요, 한다. 심심해하는 지호를 위해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켠다. 지직 거리는 음성 사이에 노래 한 소절이 흐른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땐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노인이 흥얼거리는 그 노래를 지호와 여자는 가만히 듣는다. 할아버지 노래 잘한다! 또 불러주세요. 노래가 끝나자 지호는 손뼉을 치며 조르고 할아버지는 허허, 하며 웃는다.
이 노래는 나보다 우리 집사람이 더 잘했지. 그 사람이 참 좋아하던 노래였어. 여자가 애써 묻지 않았지만 궁금하던 주제에 대해 할아버지는 먼저 얘기를 꺼낸다. 그 시절엔 다 그랬듯이 결혼식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다고. 그때가 고작 둘 다 열아홉, 스물하나였는데 그땐 다 큰 줄로만 알았다고. 밭에 나가 매일 농사를 돕던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줄줄이 둘을 유산한 다음 아들을 낳았을 때, 그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얻은 아들은 너무 귀해서 농사일도 돕지 못하게 했다고. 가서 책이나 읽으라, 말하고 부부는 제비꽃 노래를 흥얼거리며 밤낮없이 일을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가고 아이는 결혼을 하고 외국에 가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늘 아들의 행복을 바라던 부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받아들였고, 그다음에 원체 몸이 좋지 않던 아내가 긴 시간 병원에서 병치례를 하다가 오 년 전쯤 사별했다는 이야기….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어디 가서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무덤덤히 하며 할아버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여자의 귓가에는 아직도 그 제비꽃 노래가 울리는 것 같다. 여자의 눈엔 눈물이 고인다.
무슨 이야기인지 다는 이해하지 못한 지호는 여전히 해맑다. 할아버지가 준 누룽지맛 사탕을 까먹으며 해실해실 댄다. 곧이어 말한다. 오늘이 생일 빼고 가장 행복해요! 매일 할로윈이었으면 좋겠어요. 지호의 순수한 말투에 모두 웃음을 짓는다. 버텨야만 하는 하루하루에 매일 할로윈 같은 이름을 붙이고 특별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탕 하나에도 이렇게 값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현실이란 어둠이 다가올 때면 이런 밝은 마음은 늘 무색해지기만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망가버리고 만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엄마 걱정하시겠다. 여자가 지호에게 말한다. 지호는 시무룩해졌지만 엄마가 기다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자신은 늘 엄마를 기다렸지만 말이다. 지호는 할아버지에게 종종 와서 놀겠다고 하고 약속 도장까지 찍는다. 할아버지는 언제든 와서 놀라고, 사탕을 많이 준비해 두겠다고 말한다. 여자도 종종 와서 반찬 갖다 드릴게요. 한다. 여자는 지호의 신발을 신기고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드는 그의 텅 빈 두 눈동자를 뒤로하고 문을 닫는다.
지호를 데려다 주기 위해 704호 앞에 도착한다. 여자는 지호야 한 번만 안아보자 말하고 작은 지호를 품 안에 꼭 안는다. 이 작은 아이는 아직 눈부신 빛 같아서 어떤 어둠도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기척이 들리자 문이 열린다. 이제 막 집에 도착해서 지호가 없어 당황하던 엄마는 밝게 웃고 있는 지호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디 갔다 왔어. 엄마 걱정했잖아. 지호는 가득 찬 호박 모양 바구니를 엄마에게 내밀어 보인다. 여자는 상황을 설명한다. 전후사정을 들은 엄마는 지호를 돌봐주고 밥도 먹인 여자에게 연신 고맙습니다, 인사한다. 종종 일 나가실 때 지호 저희 집에 놀러 와도 되죠? 여자가 묻는다. 엄마는 안 그래도 애를 혼자 둬서 할머니가 종종 오시는데 멀리 사셔서 오시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말하며 여자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여자는 지호와 또 보기로 하고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고는 704호의 문을 닫고 열댓 걸음이면 도착하는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할로윈, 그날 이후에도 해는 뜨고 또 진다. 삶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흘러 어느새 그날 저녁은 먼 꿈처럼 흐릿해져 간다. 바라는 것처럼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것은 불어나다 못해 감당할 수 없는 만큼 커진다. 그래도 살다가 문득 떠오른다. 마트에서 사탕을 볼 때마다, 퇴근길 복도에서 들려오는 아이 웃음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출 때마다 여자는 조용히 떠올린다. 지호의 해맑은 얼굴과 사탕을 손에 쥐고 웃던 모습,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노인의 작은 어깨, 모두가 말없이 밥을 먹던 그 고요한 저녁. 그 순간들이 이따금 여자를 멈춰 세운다. 그날 이후에도 삶은 하루하루 전쟁 같아 살아남기 바쁘다. 그 탓에 그날 다짐했던 것처럼 자주 지호를 돌보러 가거나 노인에게 반찬을 건네지 못한다. 어쩌다 지나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 그뿐이다.
매일같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바닥을 드러내던 어느 밤, 여자는 문을 나선다. 한 방울의 사랑조차 마음속에서 쥐어짜낼 수 없어진 지 오래다. 여자의 표정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 불어나는 빚으로 다투다 분명 남자에게 며칠 내내 맞은 탓에 몸에 멍투성이인데도. 여자가 선 복도에는 어쩐지 찬 바람이 밀려든다. 여자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704호의 문 앞에 다시 선 자신을. 문이 열리고 지호가 환하게 웃는다. 여자는 그 작고 온기 어린 손을 잡는다. 복도의 공기가 더없이 포근하다. 둘은 함께 702호까지 달려가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열리고 한결 밝아진 얼굴의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마주친다. 어쩐지 그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셋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도 그 짧았던 하루가 얼마나 오래도록 그리웠는지 서로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리고 셋은 다시, 그 집 안으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엔 따뜻한 밥 냄새가 은은히 퍼진다. 지호는 사탕을 세고, 여자는 노인의 그릇에 국을 더 떠준다. 모두 말없이 웃는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처럼. 두번째 해피 할로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