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영화 ‘조커’를 보았다.
영화를 미리 보았던 한 친구는
‘기분 나쁜 영화’라고 표현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았다.
긴장감을 주는 음악과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끔찍한 살인마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난 마음이 답답했다.
조커의 평범했던 삶 속에는 ‘아동학대’와 같은 평범하지 않은 폭력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지 모르는 정신질환이 있었다. 그는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망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를 더 불편하게 한 것은
‘당연한 혐오’였다.
극 중에서 조커는 뇌의 어느 한 부분에 이상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전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웃음이 터진다.
물론 이 웃음은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 누구의 기분과도 상관이 없는 이 웃음으로
한 아이 엄마가 불쾌해하기도 하고,
코미디를 보던 사람들이 언짢아하며,
세 남자가 기분 나빠한다.
그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웃음 때문에
짜증을 내던 사람들은 조커를 조롱하며,
이내 혐오하기에 이른다.
혐오는 당연했다.
‘웃을 일이 아닌 일에 웃어대는
재수 없는 사람이니까.’
최근에 E.A. 포 작가의 ‘검은 고양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동물들을 좋아했지만?! 학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검은 고양이를
점점 혐오하게 되고, 끝내 잔인하게 죽이고 만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고양이가 짜증 나게 생겼으니까.
동, 서양을 막론하고 ‘검은 고양이’에 대한
다양한 속담들이 있다.
‘검은 고양이는 도둑고양이다’
‘검은 고양이는 마녀가 변신한 것이다’
‘아침에 검은 고양이를 보면 재수가 없다’
왜 이런 속설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굳이 자료를 찾지 않고,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아도 ‘검은색 고양이는 무섭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새카만 색깔’과 ‘영리한 행동’을 하는 고양이가 사람들 마음속에
약간의 두려움을 심었을 것이다.
이 두려움을 ‘저 고양이는 요물’이라는
생각과 바꾸지 않았을까.
그래서 ‘검은 고양이는 나쁜 존재’,
‘당연히 혐오해도 되는 존재’로 치환하고
불편한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기분을 언짢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웃고 싶지 않은 순간에 눈물을 흘려가며
웃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인생은 참 가련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외모로 태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된 존재들의 삶은 애잔하다.
나는 조커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어쨌든 과대망상증을 가진 연쇄 살인범이니까.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자존감을 높여가는 잘못된 캐릭터니까.
그렇지만 ‘기분이 나빠진다’는 이유로,
당연한 혐오를 일으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기분’만을 중시하는
수준 낮은 혐오와 무시, 불친절이
한 사회에 조커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