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서른은 어땠을까?
엄마는 스물여섯에 나를 낳고, 스물여덟에 동생을 낳았으니 서른에는 정신없이 육아에 몰두했을 것이다. 밥 먹이고, 입히고, 재우느라 일기도 많이 못쓰고 가계부만 썼나 보다.
아빠의 서른은 어땠을까?
아빠는 스물다섯에 졸업을 한 다음날로 결혼식을 하고,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해왔다. 30년간 해온 일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아빠의 서른에는 가장의 책임감과 교사의 의무감이 가득했을 것이다.
스무 살에 시집와서 다섯 자식을 키우면서 장사하며 세월을 보낸 우리 외할머니의 서른까지 돌이켜 보자니, 내 서른이 초라해진다.
일이며, 인간관계며, 연애까지
인생살이가 쉽지 않다고 징징대 왔지만,
나보다 어른들의 격렬했던 서른을 듣자니
내가 참 작아진다.
온실 속에 화초가 ‘덥다’고, ‘갑갑하다’고 소리 질러대는 것은 아닌지.
서른에는 생각이 많아진다.
원래도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이제 서른이니까’ 더 생각이 많아진다.
서른이라는 핑곗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스물아홉에도 고민을 했겠지만 ‘서른’이니까 더 고민이 된다.
답은 모르는 채로, ‘서른’이라는 고민의 이유가 더해진 것 같다.
서른이 된 내 친구 떠중이는 꿈이었던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가깝게 살아가고 있으며, 아주 가끔 상사의 감정 폭력으로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래도 일에 미숙한 후임을 안쓰러워하며 ‘파이팅 하자’한다.
서른이 된 내 친구 제주도 소녀는 승무원 진급을 앞두고 결혼식이라는 대사까지 치러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파이팅 하자’ 한다.
어느 친구는 아이를 낳았고,
어느 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느 친구는 암이라는 병과 싸워냈다.
서른이 당혹스러운 이유는 이십 대에 없던 세상이 내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세상이라는 곳에
그제야 눈이 떠지기 때문이 아닐까.
나만 몰랐을 뿐,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도, 내가 어렸을 때도
항상 있어왔고, 누구나 겪었을 일.
그렇지만 나는 겪을 줄 몰랐던 일.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에 현실에 눈을 떠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서른이 되어 이전보다 많은 일을 하면서
‘나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은 일’을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또 몸이 아파 앓아보면서
‘체력을 더욱 키워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좋기도, 나쁘기도 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진짜 좋은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가고 있다.
서른이 되는 것은 마냥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고민이 느는 만큼 배우고 얻는 것도 많다.
내가 사랑하는 어른들만큼만 살아가고 싶다.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저 충실하게 이 서른이란 순간을 지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