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랩소디>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예의’라는 옷을 입는다.
어젯밤 벗어 두었던 예의를 찾아내어 주섬주섬 하나씩 몸에 걸친다. 그런데 만약 ‘예의’를 다 입지 않았을 때, 방문이 열리면 화가 치솟는다. 미처 예의를 갖추지 못한 상태이기에 그 화는 오롯이 문을 연 상대방에게 가해진다.
사실 이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종종 이렇게 타이밍이 누군가는 가해자로, 누군가는 피해자로 만든다. ‘예의’를 다 차려입으면 방을 나와 씻고 식사를 한다. 밥을 먹는 이때만큼은 누군가의 방해도 없이 순수한 본능의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본능의 자유를 다 누린 후에는 출근을 한다.
가령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가식’이라는 화장을 하기도 한다.
그 중요한 일에는 꼭 가식이 필요하다. 사회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가.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 가는 상관없이 그저 ‘게으른 사람’,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 ‘기회를 못 잡는 사람’으로 판별되기에 중요한 일일수록 철저히 ‘가식의’ 화장을 해야 한다.
어떤 날에는 ‘배려’라는 구두를 신어야 하는 날도 있다.
요즘은 편해도 된다는 인식이 많아서 이런저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가끔 ‘배려’ 구두를 안신은 날에는 ‘이기적’이라거나, ‘세상 혼자 산다’는 등의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배려 구두를 하루 종일 신고 돌아온 날에는 발에 물집이 생기고 몸이 더 지치기도 한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서 나를 좁고 높은 곳에 가둬두는 일이니까. 발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다시는 구두를 안 신으리라’ 다짐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운동화만 신고 살기에는 덜 편한 곳이다. 그리고 또다시 배려 구두에 오를 수밖에 없다.
강의를 끝낸 후에 집으로 돌아온다.
배려 구두를 벗고, 가식 화장도 지워내고, 예의라는 옷도 벗어버린다. 예의도, 배려도, 가식도 내려놓으면 거울 속에 지친 내 모습이 보인다. 이때만큼은 그냥 나다. 결코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냥 나다.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든다. 행복을 약간 알 것도 같지만 이때는 이미 깨어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