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방랑은 계속된다

story 39.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고

by JJ
여행은 젊은 날의 서툰 헤엄
어설픈, 그래서 애달픈 방랑

왜 떠났던 걸까. 나는 어느 저녁의 퇴근길에 문득 멈추어 서서 얼마간 골몰한 생각에 잠겼다. 지하철 개찰구를 눈앞에 두고서 불현듯 우뚝 서서는 바닥을 따르던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얼큰히 달아오른 얼굴 위로 헤죽거리는 웃음이 비쳐 보이던 무리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지는 연인들, 전화기를 붙들고 상심의 눈썹을 일그리는 노인과 재잘거리며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살아있는 감정들이었다. 날갯짓처럼 푸드덕푸드덕 날아오르는, 그래서 그 주름 하나까지 모두 훑어보고 싶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웃어본 게 언제였지, 또 많이 슬퍼한 적은 언제였지, 손가락을 접어 헤아려볼 수도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떠났다.


왜 그곳이어야만 했을까. 지구 반대편에, 관계했던 이 하나 없고 스친 적조차 없는 이들 사이 나를 방목하고 싶었다. 걸어보지 못한 곳, 살아보지 않았던 낯선 땅에 철저히 혼자이고 싶었다. 비록 소망했던 대로 혼자였던 적은 많지 않았으나 고독을 바랐던 건 얕은 호기였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에게 기대되었던 역할에서 자유하고 싶었다. 살아가며 주어지는 역할들은 삶에 대한 담보와 같았다. 그렇기에 기왕이면 잘 해내고 싶었고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병이 났고 지쳐갔다. 걷는 행위만으로도 완성할 수 있는 여행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무언가를 보고 듣고 먹어야 할 필요도 계획도 없이, 그저 걷고 또 걸어내기만 하면 이뤄낼 수 있는 그런 여행.


왜 적고 싶었을까. 38일간 걷는 행위는 반복됐다. 일어나 전날 밤의 꿈자리를 적고 아침을 먹고 날씨를 살폈고 길에 올랐다. 걷고 또 걷고, 걷다가 밥을 먹거나 요기를 하고 다시 걸었다.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씻고 저녁을 먹었다. 잠에 들기 전 하루동안 만났던 것들을 적었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면 또 다음날이 시작됐다. 걷고 먹고 싸고 잠드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만 본다면 순례길의 하루는 너무 진부했다. 그렇다고 하루동안 달고 다니는 나의 사색에도 뭐 대단한 별 게 있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난 너무 시시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하루들을 선연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내 곁에 머무는 살아있는 것들이었다. 나무와 들꽃, 달팽이, 나비, 송아지와 양 떼,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주변을 감싸주는 풍경이자 길 그 자체였고 길동무이자 가르침을 주는 랍비였다. 존재 자체로 나의 여행과 하루들을 채워주는 그 진주알 같던 눈빛들에 대하여 적고 싶었다.


어떤 것들을 적었을까. 잊고 잃고 또 버린 만큼 찾고 배웠던 길 위의 순간들 속에서 곁을 채워주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낮과 밤으로 마주했던 모든 생명들과 판초 위로 내려앉았던 모든 빗방울과 눈송이, 숨을 가득 채웠던 숲 속의 연무와 창공을 가르던 바람, 발이 닿았던 모든 길과 몸을 뉘었던 모든 공간이 선물했던 순간을 적었다.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적었다. 그렇게도 원하는 바였다. 언젠가는 시인이 들꽃을 보듯, 또 언젠가는 화가가 바다를 살피듯 적었고 어떤 날엔 넓은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아 이야기하듯, 또 다른 날엔 대나무 숲에 마음을 털어놓듯 적었다. 적어 내려간 것들은 하나같이 내 주변의 일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엔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왜 이렇게도 오래 걸렸을까. 정들었던 낯선 삶의 마무리에 대한 글을 써내리고 싶었지만 선뜻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이었다. 글쎄, 뭔가를 적으려고 할 때마다 어떠한 실 같은 것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엮어놓은 실. 아롱아롱 매만지면, ‘툭’ 하고 달려있던 것들이 후두둑 쏟아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걷잡을 수 없이 바닥에 흩어져 이곳에 돌아오고 나서도 헤어 나올 수 없을까 봐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눈을 뜨면 낯선 곳에 있었다. 외롭고 서툰 길에 있었다. 그런데도 참 신기한 것이, 따듯했다. 더 사람답고 나다웠다. 외딴곳에서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이 여행이라 했던가.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만들어낸 가르침은 실로 컸다. 그 과정이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공에 그 대신 무엇을 채워 넣어야 더욱 견고해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것들이 남았을까. 나의 흔적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이면 떠나가야 할 곳에 여행자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나의 얼룩과 냄새, 흔적들은 모조리 소독되었을 것이다. 그저 함께 걸었던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내가 그들을 추억하듯이 누군가 추억할만한 한 조각으로 존재해 준다면 좋겠다.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적어놓은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혹은 떠나려는 누군가에게는 용기 한 조각이, 돌아온 여행자에겐 추억의 장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의 산책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내 여행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어떤 것들을 느꼈을까.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다짐했다. 야단스럽게 쏟아지는 것들을 사랑해 보기로. 가령 미처 하지 못한 준비를 뒤로하고 내리는 가을비라던가, 이제야 궁금해진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라던가, 밤하늘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는 별빛이라거나,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훑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마음 같은 것들을.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의 어느 구석에서 시작됐는지. 어떠한 생각들이 나를 그 길 위에서 묵묵히 걷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 시간들을 통해 움튼 생각들은 나를 어떤 길로 데려갈는지. 나는 그렇게 여행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거리에 남겨두고 왔다. 언젠간 다시 찾으러 가야지. 분명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 자리엔 없을 것이다. 그게 여행이 하는 일이니까. 그러므로 나의 방랑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