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고온다습한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초이다. 방학한 아이들과 하루의 일상을 보내며 짬짬이 나는 짧은 시간들을 책과 글을 쓰며 소소한 행복으로 보내는 요즈음이다.
저녁, 퇴근한 남편을 맞이하며 '수고'하였다 말을 건네는데 나의 얼굴을 본 남편의 첫마디.
"얼굴이 왜 그래?" 한다. "왜? 내 얼굴이 어떤데?"라고 물으니 남편은 내 얼굴이 깜 하다고 한다. 뭘 했길래 얼굴이 깜 하냐는 질문에 "아, 화장을 안 해서 그런가 봐"라고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며 싱크대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 뒤통수에 와 닿는 남편의 말.
"화장 좀 하고 그래. 그게 뭐야!"
잘못된 행동에 타박을 주는 듯한 말투에 순간 화가 끌어올랐다.
"아니, 왜 나한테 꾸밈 노동을 강요해? 나는 나 하고 싶을 때 할 거야!!"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과 말투의 뉘앙스를 보며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요즘 무슨 이상한 책들을 읽더니, 변했어!" 한다.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톤을 높여 가며 내 주장을 펴기가 불편해 "아이들과 있다 보면 덥고 힘들어 안 하게 돼"더라 라고 얼버무리고 나서야 나와 남편과의 언쟁은 잠잠해졌다.
나를 이상하게 변화시킨 '페미니즘'
나는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나는 편안함을 주는 둥글둥글한 성격은 아니었다. 남편과 사소한 일들로 말다툼이 잦았고 어느 장소에서든 타인으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거나 차별을 받는 느낌이 들면 발끈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감정에 치우쳐 정말 '발끈'으로 끝을 맺을 때가 많았다. 지금은 그 감정들을 곱씹고 곱씹으며 나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 보고 감정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사유화하여 표현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런 나의 감정표현들을 남편은 "변했다"라는 말로써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이다.
남편은 알고 있다. '이상한 책들'과 '변했다'라는 표현으로 나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단지 모른 채 할 뿐이다
나는 요즈음 부쩍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어 책을 사들이고 읽으며 그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답을 맞추듯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책을 통해 변한 것이 아니다. 마흔이라는 나름 긴 인생길을 걸어오며 그 길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부딪히고 마주친 불편함과 부조리함들의 삐걱거림이 있었다. 그 삐걱거림을 나보다 앞서 더 깊이 느끼고 사유화하고 그것을 연구한 여성학자들의 책들을 통해 불편함의 진실에 더 깊이 있게 다가간 것뿐이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시댁에 제사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일과 가사를 동시에 하던 워킹맘이었다.
퇴근 후 혼자 제사음식 준비에 고생하고 있을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집에 들러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 입고 갈 만큼 느긋이 출발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출근복장 그대로 시댁엘 갔다. 당시 나의 출근복은 무릎 위가 살짝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시댁 방문에 나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시어머니의 눈길이었다. 나의 복장을 스캔하듯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눈 훑틈'이란...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밝은 표정, 밝은 톤으로 인사드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음식 준비를 마친 시어머니의 노고 덕에 나는 주방 대신 제사상이 차려질 안방을 오리걸음 하듯 어정쩡한 상태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걸레질을 마치고 나가려는 순간, 시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우며,
"치마가 너무 짧다. 시아버지, 시동생도 있는데 조심해라"라는 나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말인지 시댁의 어른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인식하며 '나의 안전'을 당부하는 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 둘 바를 몰라 당황했다. 시어머니의 말은 내 몸가짐에 문제가 있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뉘앙스였다.
며느리는 왜 불편한 차림으로 올 수 밖에 없었을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 복장이 문제이고 며느리가 문제였다.
불쾌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일이 있은 뒤로는 시댁에 갈 일이 생기면 긴치마나 바지로 옷을 갈아 입고 간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몸가짐을 '자기 검열'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나의 세대는 사회의 가부장제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나의 딸들이 속할 사회는 '여성의 몸가짐류'의 속박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세상은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시대가 될 것이다. '일찌감치 폐기되었어야 할 '몸조심류'의 담론은 옳지도 않은 방향이고 가능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권김현영]
편안한 상태에서 '앎'이란 가능하지 않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가꾸기 위해 꾸밈을 하는 순간에도 다른 이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른 이를 자신의 시선에서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편안한 상태에서 '앎'이란 가능하지 않다. 경계를 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표지는 '감정'이다'
정희진 여성학자의 말이다.
남편의 꾸밈 노동을 강요하는 발언, 시어머니의 여자의 몸가짐이 문제라는 식의 담론 등은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약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발언들이다.
남성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경계,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혼여성의 경계. 이 경계선 끝엔 약자인 여성이 있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경계선에 선 순간 나는 상처 받았다.
그 상처는 나의 잘못이 아닌 나의 행동이 부주의해서 생긴 말들이 아님을 알지만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앎'으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의 주체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사유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써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상처 받은 내 감정들을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국회 본 회의에 원피스를 입고 참석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일부 더불어 민주당 당원들과 극우 성향 누리꾼들의 '성희롱 표적'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류 의원은 국회는 자신의 일터이고 원피스는 일할 때 입는 옷일 뿐인데 성희롱적 발언이 쏟아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류 의원은 "일터에서 여성은 항상 (복장이나 언행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검열이 정작 필요한 것은 성희롱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꼬집었다.
몇 해 전 나의 상황이 2020년의 젊은 세대에게도 적용되는 이 몸가짐류의 성희롱적 발언이 참 개탄스럽다.
단지 달라진 점은 이 상황에서 류 의원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었고 당 안팎의 의원들도 이 개탄스런 상황에 류 의원을 응원하며 잘못된 의식의 흐름을 드러낸 이들을 향해 쓴소리를 낸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갈 길은 멀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말하는 대신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기사를 읽으며 가슴 아팠다. 시간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아직 우리 사회의 주최자는 가부장제에서 위력을 행사하는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