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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Oct 25. 2019

설리

설리(본명 최진리·25)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f(x)) 출신인 그는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빛나는 존재감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지난 6월에는 솔로 앨범 <고블린>을 발매하며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2019년 10월14일 오후 5시4분 <연합뉴스>를 통해 설리의 사망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들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괜찮아? 메신저 화면을 끄기도 전에 친구들로부터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괜찮아?’ 한 시간쯤 후엔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묻는 목소리엔 물기가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설리의 소식을 앞에 두고 20대 동년배인 우리는 앞다투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인스타 피드에서 안부를 엿보던 동년배 스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친구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괜찮니, 친구들아. 언니들아, 괜찮니. 어디니. 밥은 챙겨 먹었니.’ 산봉우리에서 봉화라도 켜듯, 친구들은 각자의 섬에서 불을 밝혔다. ‘나는 괜찮아, 너는 괜찮니’, 메아리가 쳤다.


설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몇 년 전 친구를 잃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지킬 수 있었고 지켜야만 했던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감각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친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너무 미안해서 잠이 안 와, 어떡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이었고, 나보다는 더 씩씩하고 굳세리라 믿었던 그가 떠났다는 사실에서 오는 아득함이었다. 그의 명복을 비는 글들,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담은 트윗이 타임라인을 채웠다.


그날 여성들은 설리가 세상을 버린 마음을 약간은 상상할 수 있었으므로, 더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설리는 많은 순간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악의적인 시선에 괴로워했다. 동료 배우를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Girls supporting girls)라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노브라 셀카’를 올렸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악플을 감내해야 했다. 


악플이 설리를 죽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를 둘러싼 가십의 부피는 단순한 댓글창 이상이었다. ‘설리’라는 두 글자를 포털 사이트에 치면, 그의 노출이나 사생활과 관련된 단어로 오염된 연관 검색어가 나열됐다. 악플러만이 가해자가 아니다. 그에 대한 가십을, 여성 혐오적이고 착취적인 소문을 스포츠처럼 퍼나르는 순간들을 방관한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여성 혐오 분위기에 더 적극적으로 몸을 부딪치며 싸우지 않은 나도 반성한다.


“나는 정말로 설리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유롭게 나이 드는 것, 정말로 보고 싶었다.” 한 누리꾼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나 또한 설리와 함께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지 못해 아쉽고 슬프다.


죽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과 함께 할머니가 되는 상상을 한다. 나이를 먹고, 떠들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아남고 싶다. 기를 쓰고 버티지 않아도, 이를 악물지 않아도, 웃으며 잘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허락되기를. 그런 삶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그래서 노래한다.


‘여자들아 여자들을 더 사랑하자. 여자들아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남자. 다 같이 할머니가 되자. 멋대로 춤추고 노래하자.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자.’


-천다민 <한겨레> 젠더미디어 ‘슬랩’ 피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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