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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Mar 28. 2020


​<골든아워> 중

부산대학교병원의 조석주 교수가 임상강사 한 명을 추천했다. 자신이 전공의 때부터 오랫동안 보아온 현직 윤군 군의관으로, 내 밑에서 외상외과 수련을 받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나는 2002년 외상외과를 세부전공으로 시작한 이래 아주대학교 병원이 중증외상특성화 센터가 되기 전까지 혼자였다. 사람이 필요했으나 사람은 없었고, 나중에는 나 스스로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간혹 외과전문의를 마친 후 수련받고 싶다고 찾아오는 임상강사 지원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새 구두를 신고 새 길에 접어드는 그들을 진창으로 잡아끌고 싶지 않았다. … 진흙탕에 뒹구는 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 그러나 그 군의관은 뜻을 꺾지 않았다. 부대에 휴가를 내고 기어이 나를 찾아왔다. 바로 정경원이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보아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울림이 있어 그 음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경원을 보면서 욕심이 동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의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말없이 정경원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 수렁을 함께 헤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솟았다.     


그는 수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겸손하고 성실했다. 환자를 수술하고 진료하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힘을 쏟았다. 정경원의 책상에는 언제나 반쯤 열린 교과서와 주요 논문집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늘 성경이 독서대에 반듯이 펼쳐 있었다.    


내가 정경원의 거처조자 마련해주지 못했을 때 김지영이 나섰다. 중환자실 옆 회의실 한쪽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2층 침대와 책상을 들였다. 회의실에는 화장실은 물론 세면대조차 없었으나 정경원은 묵묵히 버텼다. 이른 새벽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정경원의 나지막한 통성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하루도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환자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 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정경원의 신심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를 돕는 것이 내 몫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자각했다. 내 인생에서 정경원 같은 사람은 만난적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국종 <골든 아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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