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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Apr 08. 2020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고민정 저희가 올해로 결혼 12년이에요. 결혼 10주년 때, 제게 시를 써줬는데 한 구절이 책에 나와요. “세월을 사용하기로 사랑만 한 것이 있으리오.” 많은 사람이 저희에게 ‘어떻게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냐?’고 하는데, 저희도 때로 싸우고 실망하고 분노도 치밀어요. 제가 가출한 이야기도 책에 썼잖아요. (웃음) 그런데, 다만 노력하는 부부인 것 같아요. 이 노력 가운데는 서로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 같이 때문에 하는 노력도 있어요.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뭔가를 얻고 싶어 하잖아요. 사랑은 노력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들 하지만, 저는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부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때, 그리는 모습이 같아요.


조기영 아내랑 제가 10살 차이가 나잖아요. 여자들은 기대 수명이 더 길다고도 하고. 연애 초기 때만 해도 “나는 백 살까지 살 거야”라고 했는데, 지금은 노년이 더 길어졌어요. 외롭고 쓸쓸한 노년이 되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꿈이 있는 상태에서 노년을 맞이하면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민정 씨도 글 쓰는 일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노년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민정 씨가 소설도 시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글쓰기만큼 노년을 풍성하게 하는 건 없을 것 같아요. 


고민정 씨의 전작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는 제목부터 남편에 대한 사랑 고백이었단 말이에요? 이번 책에서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나오는데, 영화 같더라고요. 많이들 아시지만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였잖아요.


조기영 반했죠. 아내한테. (웃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짓말을 잘 못해요. 시를 쓰는 사람이 쓰는 소설은 대개 작가의 삶의 궤적, 현실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고민정 저희 부부를 너무 특별하게 안 봤으면 좋겠어요. 11살 차이가 나는 시인과 아나운서, 이런 타이틀로 보면 조금 남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같아요. 남편 나이가 아무리 많으면 뭐해요. 정신연령은 보통 남편들이랑 똑같죠. 저희는 특별하지 않아요. 저희가 결혼할 때, 기자들이 취재를 왔어요. 저는 그게 너무 놀라웠어요.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하는데 저는 시인을 좋아한 거잖아요. 우리의 사랑도 사람들의 모습 속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조기영 2000년에 시집을 냈는데 지금은 절판했어요. 글 쓰는 사람이라면 등단을 준비하고 꿈을 꾸는데, 이 방식들이 좀 획일적이지 않나 생각해요. 좀 잘못됐다는 생각이에요. 시를 쓰는 삶 자체를 살면, 시인인데 어느 순간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게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구 사회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시인으로 불려지는 경우를 종종 봤어요. 개인적으로도 반성의 지점인데, 좋은 시는 많지만 생각보다 좋은 시집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호연지기일 지 모르지만, 저에겐 천 년 뒤에도 남을 시집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조기영 그렇죠. 저는 고민정 씨를 만나서 경제적 기반이 해결됐잖아요. 문인들에게 이런 기반은 많지 않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좀 다르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생이라는 시간 가운데 많이 고민하고 준비해서, 꽉꽉 채운 시로 사랑 받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어요. 문인들이 교단으로 많이 가는데, 저는 좀 비판적이에요. 삶의 어떤 안락한 기반을 갖고 시를 쓴다는 게, 타협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고민정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 달라요. 이 사회가 시인들이 시만 쓰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세상이 안 되기 때문이니까요.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요. 일년에 시 한 편을 써서 생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강연 같은 건 안 해도 되죠.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가 안 되기 때문에 특강도 하고 칼럼을 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국가가 문화예술인에게 여러 가지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민정 신혼 때는 생각이 없었어요. 둘이서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해서 둘이서만 살고 싶었어요. 은산이를 낳은 게 결혼 6년 만이었는데, 긴 시간 동안 남편이 저를 설득하려고 했다면 생각을 못했을지도 몰라요. 남편이 기다려줌으로 인해서 저 스스로 변화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낳자고 한 것도 제가 먼저예요. 저는 애들이 종이접기를 하다 낑낑대고 있으면 가서 도와주는데, 남편은 기다려요.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애들은 곧 하더라고요. 


조기영 민정 씨한테만큼은 못 기다려줘요. 확실히 아들과 딸을 대할 때는 달라져요. 사내 아이는 확실히 남자 대 남자, 본능이 불꽃 튀는 순간이 있어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부드럽고 자상할 거라 생각하는데, 아들을 대할 때는 다르더라고요.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고민정 생각이 조금 다른데요. 저는 한편으로 남성들이 안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게 제일 좋잖아요.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자신의 꿈과 상관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배워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취미를 배우기보단 특기를 가르치는 거죠. 그래서 좀 짠한 마음이 있어요. 요즘 젊은 아빠들은 평일에는 야근하고 주말에는 애들이랑 놀아주기 바빠요.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들도 많은데, 너무 남자들이 혼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죠. 


부부관계가 좋은 이유가 여기서 보이네요?


고민정 항상 그래요. 남편은 여자 편들고, 저는 남자 편들고. (웃음) 


고민정 우리는 늘 고민해요. 이 길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가보지 않은 길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있어 망설이거든요. 그 때, 한 번 새로운 길을 가보라고 탁 건드려주는 사람이 제게는 남편이었어요. 아나운서의 꿈도 마찬가지였고요. 캠프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너무 많은 고민을 했어요. KBS는 안정적이고 정년이 보장된 곳이니 몇 년 뒤에는 후회하지 않을까, 안정적인 이 삶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어요. 그때 남편은 저를 탁 건드려주며 “당신에게 열정과 확신이 있으면 한 번 가도 괜찮아”라고 말했어요. 그 한 마디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고민정 그렇죠. 2월부터 6월까지는 당장 저희한텐 월급이 없었어요. 물론 퇴직금이라는 좋은 제도 덕분에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지만요. 지금도 퇴직금으로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초조함, 불안감은 없어요. 올해로 제가 서른 아홉인데 아직은 상당히 젊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15년 동안 사회생활 하면서 만든 무기로 우리 아이들 밥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지금 세상은 직장이 전부가 아니에요. 하나의 도구인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너무 길잖아요. 한 직장에 올인하는 것보다 내 능력을 개발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글도 그래요. 적더라도 인세는 제게 큰 도움이 돼요.


조기영 시인으로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저로서는 (웃음)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굉장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민정 저희가 이렇게 달라요. (웃음) 


특히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고민정 아이 엄마, 아빠들이 많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도 결혼이 지옥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결혼한 사람들은 안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잖아요. 좋은 이야기는 바탕이 되고, 힘든 일은 툭툭 튀어나올 뿐인데 말이에요. 결혼을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해볼만한 일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결혼을 하고 싶다면, 어떤 상대를 만나면 좋을까요? 


조기영 ‘이 사람과는 끝까지 가겠구나,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상대를 만나는 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졌는지,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비판을 견딜 준비가 되었는지도 중요해요. 남자들은 소유 의식이 강하잖아요. 소유라는 개념으로 결혼을 보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기영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나가서 말했지만 전 이미 꿈을 이뤘어요. ‘시를 평생 쓰겠다, 멋진 사랑을 해보겠다’, 이 두 가지를 이뤘으니까요. 그래서 전 욕심이 없어져버렸어요.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 두 아이가 큰 통과의례 없이 사춘기를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중이병은 절대적인 질병이니까요. 아이랑 큰 파도 없이 지났으면 좋겠는데 인생이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고민정 씨는 항로를 잘 헤쳐나갈 것 같아요. 부부 중 누구 하나가 잘 나가고 그러면 질투한다고 하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꿈을 다 이뤄서 그런 것 같아요. (웃음)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고민정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이 많은 걸 알아요. 하지만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진 않았으면 해서요. 한 번 부딪혀볼 만한 세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왔고 이 책도 썼어요. 돈이 좀 없어도, 미래가 좀 불투명해도, 아이가 두 명이나 생겨도 한 번 부딪혀볼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고민정 조기영 부부 “다른 길이란, 가지 않으면 없는 길”> 채널 예스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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