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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Jun 05. 2020

예술과 진리

의미를 향한 탐색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현대 유럽 문화에서 거의 아무것도 답을 제시하는 데 전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 그토록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어떤 영속적인 진리와 연결되려는 시도를 멈추고, 아름다움이나 진리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일체 포기하는 대신 대중에게 이렇게 말하게 된 것 같다. “나도 여러분처럼 진창에 빠져 있습니다.” 확실히 20세기 유럽에서 예술가의 목표와 대중의 기대가 바뀐 시점이 있었다. 이런 변화는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접근법이 존경(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에서 경멸(어린애라도 저 정도는 하겠다)로 바뀐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기술적 야심은 크게 위축되었고 종종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예술의 도덕적 야심도 같은 궤적을 따라갔다. 마르셀 뒤샹과 가령 그의 작품 <샘>을 원흉이라고 탓할 수도 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유럽 예술 문화가 대부분 무너졌기 때문에 그는 단지 다른 예술가들이 따르고자 한 길을 이끌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전시실을 거닐다 보면 기술적 솜씨가 부족한 것보다 더 인상적인 점은 야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교적 대담한 작품들은 우리에게 죽음이나 고난, 잔인함이나 고통에 관해 말해 준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 말고 이런 주제에 관해 실제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은 거의 없다. 확실히 작품들은 스스로 보여 주는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누구나 고난과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며, 설령 모른다 할지라도 미술관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예술은 우리 안에서 다른 어떤 것을 타오르게 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것 같다. 특히 우리를 종교의 정신이나 발견의 전율 같은 것과 연결하려는 열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면서도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진리를 이제 막 따라잡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런 느낌은 심오한 진리에 다가갈 때만 생겨나는데,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렇듯이 예술가들도 진리에 다가가고 싶다는 열망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그럴 능력을 잃었다.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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