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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Jun 04. 2020

현대인의 실존적 공허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삶은 어느 정도 천박하거나 피상적이며, 특히 현대 서유럽의 삶은 목적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며,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자신의 행복 개념을 추구하도록 독특하게 제공하는 기회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매일같이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가족과 친구, 그 밖에 많은 것으로부터 깊은 의미와 사랑을 발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데, 이런 의문은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서 중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내 삶은 무엇을 위한 걸까? 삶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이런 의문은 언제나 인류를 움직여 왔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서유럽인들이 보기에 여러 세기 동안 우리가 매달려 온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바닥이 난 것 같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가 바닥나는 상황에서도 그래도 여전히 똑같은 의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조차 무례한 일처럼 되어 버렸고, 따라서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도 그 수효만이 아니라 답을 찾으려는 야심까지 줄어들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이제 교회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이따금 찾는 화랑이나 독서모임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2007년 뮌헨의 예수회 철학대학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자각>이라는 제목의 토론을 이끌면서 이런 측면을 언급했다. 거기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사는 <포스트 세속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는 공백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1991년 취리히의 교회에서 열린 한 친구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도식은 친구가 남긴 지침을 꼼꼼히 따르면서 진행되었다. 관을 앞에 두고 두 친구가 연설을 했다. 하지만 사제도 없고 신의 은총을 비는 기도도 없었다. 재는 ‘어딘가에 뿌릴’ 예정이었고, ‘아멘’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무신론자였던 친구는 종교 전통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비종교적 견해가 실패했다는 것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버마스가 친구의 뜻을 해석한 것처럼, <계몽된 근대는 삶을 끝내는 마지막 통과의례에 대처하는 종교적 방법의 적합한 대체물을 찾지 못했다.>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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