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를 읽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류는 비주류가 되고 도시는 변방이 된다. 20세기 전반에 세계를 휩쓴 우생학은 어느덧 이론으로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비웃음을 산다. 그렇다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어떨까. 불륜을 저지르고 상간남에게로 간 코니는 1920년대 화제의 이단아였다. 모두 코니를 손가락질했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금서가 됐다. 이후 30년 동안 이어진 외설 논란은 작가 사후인 1960년 펭귄사가 무삭제판을 출간하면서 소송으로 비화했다.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의 노력 끝에 법원은 그해 11월 2일 출판 무죄를 선고한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명서로 인정받았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읽힌다. 그러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나온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나는 2022년의 관점에서 코니를 다시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20년대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파격적, 급진적인 내용이었음에는 여지가 없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성의 불륜은 금기시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과 같은 책에서 여성의 불륜은 오락거리로 전락한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자살이라는 결말을 부여하여 그들을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코니는 죽기는커녕 상간남인 멜러즈와 희망적인 결말을 맞는다. 코니는 멜러즈와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간다. 이는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던 로렌스가 인간다움을 찾아 나가는 코니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정말로 과연 산업 사회 비판과 여성의 자아실현에만 비중을 두고 쓰인 소설인지는 의심스럽다.
1973년에 출간한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채털리 부인의 오르가슴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도대체 나는 어디가 잘못된 건가 의문을 품었다. 채털리 부인이 사실은 남자라는 사실을 그땐 왜 몰랐는지. 채털리 부인은 사실 D.H.로렌스였다.’ D.H.로렌스가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타자화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담은 이 책은 타임지에서 선정한 ‘1970년대를 대표한 도서’로 꼽힌다. 이는 1970년대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내용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남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성행위를 하고 여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이라는 멜러즈의 대사는 1970년대 이후로 나와서는 안 됐다.
D.H.로렌스는 어쩌다가 이러한 문장을 쓰게 되었을까. 무릇 작품에는 작가의 일생이 담기기 마련이니,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고 추측해보겠다. 젊은 로렌스는 자신을 가르친 교수의 부인, 프리다 위클리와 사랑에 빠진다. 프리다는 유부녀였지만 그건 그들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고 끝내 프리다는 교수와 이별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리 아닌가? 로렌스의 교수가 클리퍼드, 프리다가 코니, 그리고 로렌스 자신이 멜러즈에 각각 들어맞는다. 이외에도 로렌스가 멜러즈에 이입하고, 그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한다는 것은 글의 곳곳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멜러즈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서’, ‘자신들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 감정과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직관력, 그리고 마지막 남은 건강한 본능까지 미친 듯이 죽여 없앤다면’, ‘인류여 안녕! 하고 종치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거나, ‘조금씩, 산업에 물든 그 모든 삶을 떨쳐버리고 본연으로 도라가자’고 말한다거나.
그런데 이렇게나 닮은 로렌스와 멜러즈 사이에는 치명적인 차이점이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쓸 당시 로렌스는 폐결핵 진단을 받은 터라 몸이 몹시 쇠약했다는 점이다. 반면, 멜러즈는 육체적인 매력이 절정에 달한 건강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병든 로렌스는 왜 건강한 사냥터지기에게 자신의 마이크를 들려줬을까? 이건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병든 로렌스는 예전처럼 프리다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의 코니, 곧 프리다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마치 영웅담처럼 써 내려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 사랑한 것은 젊은 시절의 자신이 가진 헤게모니적 남성성이었으며 이 소설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바치는 헌사이자 자기 위로이다. 그래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남성적 판타지가 활개 치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시대에 맞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무엇일까. 1980년대 한국에서는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가 히트한다. 이 또한 주인공이 배우자와의 이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주인공이 나아가는 방향은 <채털리 부인과의 연인>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의 코니는 성장에 있어 멜러즈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클리퍼드를 떠나 멜러즈와 결혼생활을 하지만, 자신이 바랐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코니가 멜러즈를 선택한 까닭은 코니가 클리퍼드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니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멜러즈는 자신을 따라주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떨어지는 멜러즈를 택한다면 자신이 집안에서 클리퍼드처럼 군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으며, 이를 깨달은 코니는 멜러즈와 이별한다. 코니가 ‘나의 고독은 순순하고 감미롭다. 사랑조차도 들이고 싶지 않을 만큼.’이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또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2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그 아이는 귀족>이라는 영화가 상영했다. 이 영화의 코니는 <서 있는 여자>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코니는 멜러즈의 부인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멜러즈의 부인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코니는 부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멜러즈와 결혼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이후 다시금 부인과 재회하며 멜러즈가 자신의 성장에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코니는 멜러즈와 이혼하고, 멜러즈의 부인과 코니는 모두 이전보다 행복한 생활을 누린다. 영화 말미의 코니가 친구와 함께 활짝 웃는 표정에서는 1980년대의 코니가 느꼈던 고독이나 외로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들의 코니는 항상 변화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묘사한 성(性)은 1920년대에는 진보적이었을지 몰라도 2022년에 읽기에는 고리타분하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완성도 있는 소설이며 우리가 여전히 이를 통해 배울 점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시대가 변했다. 현대 여성이 꿈꾸는 것은 바기나 덴타타일뿐 육체적 결합을 통한 자아확립이 아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나의 이런 생각조차 고루한 것으로 변모할 것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기 때문이다. 나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22세기에는 아마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여성의 자아실현을 묘사할 것이다. 22세기의 누군가가 21세기의 나를 보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22세기의 코니를 기대해본다.
간만에 브런치 오니까 반갑다!!
그동안 책을 안 읽었던 건 아닌데 그냥 게을러서 못 썼다.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