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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계 Feb 14. 2024

독도에서

                                                           

  3년 전부터 가려던 독도였다. 그런데 막상 출발 날짜가 정해지면 빼곡한 일정에 발목이 잡혀 주저앉곤 했다. 올핸 다행히 7월이어서 방학이라 떠날 수 있으리라, 독도와 함께 할 3박 4일이 기대되었고 문우들과 함께 할 시간 역시 여간 설레는 게 아니었다. 


  출발 열흘 전 새벽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엄마가 의식을 놓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허둥지둥 차를 몰아 요양원으로 갔고, 엄마를 태운 119구급차를 따라 공주에서 세종으로, 세종에서 대전으로 비상등을 깜박이며 달렸다. 다행히도 코로나가 잠시 주춤하던 때였다. 

  엄마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날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늘 바다가 있었고 썰물 때 드러난 독살에서 어른들이 남기고 간 물고기와 꽃게를 잡던 소녀가 있었으며, 죽방렴을 만드느라 갯벌에 대나무를 꽂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그들의 몸짓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던, 고둥 줍던 소녀도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1930년생 이복구로 태어나 살다가 한국전쟁 이후 1932년생 이정선으로 살아오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에 홍성고등학생이었던 사람과 결혼했는데, 전쟁에 나가 잃었고, 큰외숙은 7년 만에 친정에 찾아온 엄마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여 우리 아버지와 재혼시킨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서도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온 엄마는 5남매를 낳고 키우면서 고생만 하시다가 5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2주 만에 깨어났으나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편마비에 언어장애까지 있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표현할 수 없게 된 엄마, 이야기꾼이었던 엄마는 목이 말라도 물을 달라고 할 수 없고 추워도 이불을 달라고 말할 수 없는, 모든 걸 타인의 손길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엄마를 내가 모실 수 있는 건 3개월, 고작 3개월뿐이었다.


  말할 수 있음이 축복이고 기적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의지로 내 손발을 움직여 뭔가를 할 수 있음이 축복이고 감사라는 걸 엄마를 통해 깨달았다. 엄마는 불편한 몸으로 우리들에게 겸허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셨다. 그런데 코로나가 창궐했고, 엄마한테 들락거릴 수 없게 되자 엄마는 우리들을 잊어버렸다.


  구급차와 함께 간신히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CT를 확인한 의사는 머리가 다 막혔다고, 중환자실로 가야 한다고 한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모셔가겠다고 했다. 의사가 놀라는 눈치다. 그러면 곧 돌아가셔요, 하는 의사의 말에 중환자실로 가면 안 돌아가시느냐고, 어차피 가실 길인데 하루라도 더 고생하시게 할 필요 있느냐며 돌아와 요양원 특별실에서 임종을 준비했다. 


  엄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것 같았다. 깊이 잠든 고요한 숨소리, 얼굴과 목덜미, 가슴까지 이어지는 뽀얀 살결은 보드라웠고 표정도 편안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예뻤었나, 엄마 손이 이렇게 예뻤었나, 엄마 다리가 이렇게 날씬했나, 욕창 하나 없도록 보살펴준 손길이 고마웠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내 엄마여서 자랑스러웠다고, 하나님 품으로 안녕히 가시라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속삭였다. 5년 전 “이대로 가실 순 없어요, 눈을 떠보세요. 휠체어에 앉아 살아도 좋으니 일어나셔요.” 울부짖던 때와 전혀 다른 속삭임이었다. 멀리 있는 자식들과 친척들까지 다녀갔다. 그리고 목사님께 연락드려 임종 예배를 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30분 후 엄마의 호흡은 멈췄다. 의식을 잃은 지 이틀만이었다.

  

  엄마를 선산에 계신 아버지 곁에 모시는 날은 폭염속에서도 가랑비가 내려 상여꾼들의 땀을 씻어주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나는 하늘을 우러렀다. 삼우제를 지낸 다음 날에는 남동생과 함께 엄마 타고 가신 꽃상여를 불태웠다.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6월의 보름달이 위로해주는데  반딧불이 같은 불티가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꽃상여가 될 거라고 했다.


  엄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는 독도로 향했다. 엄마가 의식을 잃었을 때 취소하려던 일정이었는데, 나의 속내를 눈치챈 엄마가 서둘러 떠나신 것도 같고, 그동안 엄마가 해오시던 기도, 내가 이어오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도 같았다. 


  독도로 향하는 날,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영일만에 도착하니 눈앞에 바다다. 생명의 근원인 바다, 엄마 유년 시절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 그곳에서 나는 유람선을 타고 울릉도로 향했다.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서 나도 모르는 새 깊은 잠에 빠졌다가 다음날 새벽에 깨어 선상으로 올라갔다. 망망대해에 일출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아, 엄마! 

  “엄마!” 

  선상에서 나는 목청껏 엄마를 소리쳐 불렀다. 

  “엄~~마!”

  소리가 클수록 눈물도 많이 나왔다. 엄마 올라가신 하늘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끝없는 사랑의 고백이 이어졌다.


  아침에 울릉도에 도착하여 딸이 챙겨준 멀미약 한 병 마시고 배를 갈아타 독도로 향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밟아볼 수 있다는 섬 독도, 선상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바닷물처럼 출렁이는데 눈앞에 독도가 나타났다.

  독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광활함에 둘러싸인 독도는 뜻밖에도 시커멓게 탄 가슴으로, 숭숭 구멍 뚫린 가슴으로 망부석이 되어 서 있었다. 정체성을 짓밟는 사람들 때문일까, 모국을 향한 그리움으로 타들어 간 것일까. 


  독도, 망부석이 된 엄마는 삶이 그러했듯 쉼없이 다가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그 위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한겨울 된서리 칼바람도 스쳤으리라. 끊임없이, 끝도 없이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고 내어주고, 품어내고 길러내는 바다였던 엄마가 숭숭 구멍 뚫린, 시커멓게 탄 가슴으로 독도가 되어 서 있었다. 그 위를 갈매기 떼 2代 가 날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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