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날의 봄, 묵직한 카메라와 더 묵직한 렌즈가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때. 기대와는 다르게 날씨는 우중충했다. 빈틈하나 보이지 않는 먹구름 속에서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 우산을 쓰고서 다른 한 손으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쫓기듯 찍기 시작했다. 장대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긴 겨울 끝에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낙엽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홍매화 꽃잎이 빗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굵은 빗줄기 소리가 내 귀를 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 때문인지 마음만 조급했다. 나름 카메라를 보호한다고 애를 써보지만, 지금 이 상황은 정말이지 최악이다. 사진찍는 행위를 애정하지만, 카메라를 딱히 소중하게 여기진 않았다. 욕구와 귀차니즘이 혼재된 매우 불친절한 주인이다. 수년간 써온 렌즈도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로 닦았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건 출사 전날 배터리를 체크할 때 뿐이었다. 카메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사진의 퀄리티는 비례하는 걸까. 사진 속에 나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도 없다. 내 사진 속에선 나 자신을 찾을 수 없다. 영혼없이 누른 셔터 그 이후엔 책임질 수 없는 무의미한 장면들로 가득했다. 집에 돌아와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볼 때면, 그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채우고 싶은 무언가를 아무 죄 없는 카메라를 향해 원망하듯 퍼부었다.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