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마음은 스무살 청춘이건만
재작년에 환갑 지난 '김아무개' 씨와
그의 카센터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두 살 아래 '이아무개씨'가 꼭두새벽부터 채비를 서두른다.
- 처음이라 쪼까 떨리는데 괜찮겠지라?
- 떨리긴 뭐시 떨려. 푹 퍼진 아지매들 천질턴디
- 그래도 성님이 저번에 읍내서 만났던 아지매는 괜찮던디요?
- 가뭄에 콩나듯 고런 아지매도 있긴 하지. 내가 그 맛에 가는거 아녀
- 오늘도 하나 쯤은 있겠지라? 성님만 재미보지말고 지도 좀 알려주소. 성님만 믿고 가니께.
- 너무 기대허덜 말고, 그냥 친구들이다 생각하고 막걸리나 진탕 마시고 놀면 되야. 평소처럼
그래도 4만원이면 술값치고는 싼편아니여? 버스만 타면 산에 델다주지. 아지매들이랑 재미지게 노는 돈 치고는 겁나 싸게 먹히재.
- 하이고. 그래도 4만원이 어디 작어라? 4만원이면 돼지고기가 몇근인데, 성님 말마따나 어디 돈값하는가 한번 봐야겄어라. 허허허허허
그렇게 둘은 남들 다 자는 일요일 새벽부터 껄껄대며 덜컹거리는 김씨의 오래된 트럭에 몸을 실었다.
처음가는 산악회라 들뜬 이씨는 일주일 전, 시장에서 구입한 시뻘건 등산잠바를 걸치고는 거울로 연신 자신의 콧구멍을 점검했다.
누가 봐도 '나 오늘 등산가요.' 하는 옷차림이었다.
콧구멍을 한참 들여다보던 이씨는 이번엔 머리에 바른 젤을 한참 매만지더니 참빗으로 쓰윽 한 번 더 빗어 올린다.
평소 카센터에서 기름때 잔뜩 묻힌 작업복만 입고 다니던 이씨가 맞나 싶다.
- 이거 머리에 바르는거 맞는가 모르겄네. 성님이 하도 재촉하는바람에 암거나 발랐는디
- 아 아무거나 바르면 되지. 뭔 상관이당가. 동상은 원래 우리 마을에서도 한 인물 하잖여. 언제 옷도 한 벌 샀는갑네
- 괜찮여요? 지가 빨간색이 쪼까 잘 어울리는디, 뒤져본게 집에 죄다 마누라 옷이고 어떻게 된게 나는 제대로 된 잠바 하나 없는가 몰겄어. 그래서 저번주에 큰맘먹고 하나 장만했지요. 이거 59000원짜리요. 내가 옷에다 5만원 이상 쓴건 난생 처음이라니까.
- 59000원? 그것보다는 한참 비싸보이는디, 땡잡았네
- 말도 말어요. 옷이 문제가 아니라 어제부터 마누라가 얼마나 쥐잡듯이 잡는지. 맞춰주니라고 혼났다니께? 초등학교 동창모임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도 전화를 걸어보라고 고함을 질러대서는. 내가 그럴줄 알고 동창 친구녀석 3명한테 미리 부탁 안해놨음 아주 클날뻔 했어라. 마누라 성격을 지가 제일 잘 알잖소. 근데도 이거 짠거 아니냐고 얼마나 캐묻던지. 하이고 내가 진짜 등산 한번가려다 사람 잡겠다 싶었다니께.
- 아 남들은 서방 못쫓아내서 난리드만. 자네 집사람은 왜그러는가? 하따 겁나게 사랑하는갑네.
- 허허허허허허 성님, 다 아시면서. 사랑은 무신... 맨날 여편네들끼리 목욕탕에 진치고 앉아서는 남편 얘기 자식얘기 오만얘기 다하다가. 아 거 우리 집앞에 '미미슈퍼' 있잖아요. 거기 엉덩이 푹 퍼진 주인아지매. 그 아지매가. 요즘 아자씨들 남자들끼리 동창모임한다고 나가드만 알고보니 산악회가서 별거별거 다 한다고. 그렇게 난리를 친거 아니요. 즈그 남편도 산악회 갈라다가 아주 딱 걸려가지고는 뼈도 못추렸다든디. 쥐꼬리만한 용돈도 다 뺏기고 암데도 못가게 하고 일만 시킨데요.. 여편네들 성격 얼마나 지랄같은지. 그 얘기 듣고 와선 우리 마누라도 그 난리 아니요. 담부터는 다른 핑계를 대든가 해야지. 아주 못쓰겄어.
- 알았응게. 저저저 저기 봐봐. 경기장 앞에 관광버스 줄 쫙 서 있재? 거기 앞에 써진거 찾아봐. '일요행복산악회'라고 종이쪼가리 붙었을턴디
- 어메 이렇게 가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이 정도로 많은지는 몰랐는디 큰일났네.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허네
- 큰일나긴 뭐시. 저거 우리랑 다 같이 가는사람 아니고 한 차만 우리 일행이여
- 성님 이 차 아니여? 이거 같은디?
- 어어 이거 맞네. 아이고~~~~ 김 회장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 김씨. 자네 왔는가? 옆에 계신분이 오늘 같이 온다는 그 동상?
- 예예. 지보다 두 살 적어요. 어렸을때부터 잘 알던 동생인디, 제 일도 도와주고 아주 성실해요.
얼른 인사혀. 우리 산악회 김 회장님이신데, 우리랑 같은 고향 출신에 해병대 397기 선배님이시라니께.
- 아이고. 처음뵙겠습니다. 선배님. 이아무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후배님 반갑네~ 앞으로도 자주자주 보자고? 근데 차 탈라면 쪼까 기다려야되는디. 여사님들 아직 다 안왔어.
.
.
.
아침부터 카레를 한 솥 끓여놓고, 밥통까지 체크하고선, 집을 나서려는 순자씨.
"카레랑 밥이랑 다 해놨은게. 짱깨 시켜먹지 말고 밥 해놓은거 싹싹 비워요. 나 늦어가지고 지금 빨랑 나가봐야 되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몇번을 얘기해. 너무 신나서 넘어지지나 말고. 아주 천천히 갔다와~ 재미지면 한 일주일 갔다와도 되고"
"일주일은 무신. 민수아빠. 아까 세탁기도 돌려놨으니까 소리나면 빨래도 좀 널어놓고. 밥 먹으면 설거지도 해놓고.
그래야 집에서 냄새 안나지. 빨래도 바로바로 안 널면 두 번 빨아야 되니까 제발좀 널고. 알았죠? 자 여기 2만원."
"알았으니까 돈 거기다 놓고 잘 갔다와. "
새벽같이 일어나 뒷머리 세팅에 앞머리엔 힘을 잔뜩 주고, 얼굴엔 한참 밝은 톤의 파운데이션.
거기다 붉은색 루즈까지 진하게 바르고선 등산조끼를 걸친 순자씨가 한심스러운 눈으로 남편을 바라본다.
"에휴..."
저번달에 처음으로 산악회를 나가보니 남편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얼마나 산을 탔는지, 등산으로 다져진 얄쌍한 몸에 세상에 어떤 할배는 근육까지 달고 쌩쌩 날라다니드만. 어찌된게 우리집 양반은 배가 남산만치로 나와가지고 저렇게 삼시세끼 집밥먹는 삼식이에 TV만 쳐다보고 있나 싶어 순자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는다.
"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운동도 좀 하고!!"
.
.
.
관광버스에 올라타니 어떻게 된게 하나같이 빨주노초파남보 현란한 등산복에 번쩍이는 선글라스는 기본.
그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진 이씨. '뒷집 택시기사 양반 꺼라도 하나 빌려 쓰고 올걸 그랬나' 잠시 생각하는데...
그때 뒤에서 카센터 김씨 형님이 작게 속삭인다.
- 쩌어기, 뒤에서 세번째 앉은 저 아지매, 얼굴 함봐봐"
- 모자에 선글라스랑 마스크까지 다 쓰고 있는데 어찌 얼굴을 본다요. 하나도 안 보이는고만.
- 아 딱보면 몰라? 저렇게 다 가렸어도 고운 아지매는 테가 나잖아. 얄쌍하니 분칠도 고와보이고
- 성님 우리 같이 앉는거 아니였어?
- 같이 앉기는. 여기까지 와서 나랑 붙어 있을라고 했어? 지겨워 죽겠구만.
아지매 혼자 앉아있는데 찾아서 얼른 엉덩이 붙여.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니까.
- 하따 남사시럽게....
저 좁은 버스 의자를 처음보는 아지매랑 엉덩이 맞대고 앉아서 갈 생각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씨.
그때 등산복 한무리들이 잽싸게 여자들 옆자리를 차지한다.
그때서야 이씨도 수컷의 본능으로 재빨리 한 아주머니 옆에 다가서는데,
- 크음.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앞뒤로 아는 사인지 아주머니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서도 고개를 들고 수다떠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도 남자들이 타기만하면 금세 긴장을 하고는 위아래로 쳐다보느라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선글라스를 낀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가. 이건 가을햇살을 피할 요량이 아니라 처음보는 아저씨들 때깔이 궁금해서_ 하나같이 어두운 버스 안에서도 다 똑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곤 고개를 쭈욱빼고 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아줌마건 아저씨건
이성에게 설레는 마음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거리는게 세상이치.
순자씨도 이렇게 관광버스에 남자반 여자반 타고 있는걸 보니 어릴적 학교에서 놀러가던 생각도 나고, 학창시절 설레던 그 감정도 떠오른다. 큭큭 웃어대면서 요란스럽게 인사하는 커플도 여럿 보이는데...
그렇게 즐겁다가도 혼자 앉아있으니 내 옆에는 아무도 안앉을까 싶어 괜시리 걱정도 된다.
그 때,
- 크음. 실례 좀 하겠습니다.
순자씨가 제일 싫어하는 색이 빨간색인데, 시뻘건 잠바에 머리는 왁스를 얼마나 들이부은건지 축축한 머리를 내밀며 90도로 인사하는 한 남자. 아무리 봐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싶어 순자씬 고개를 돌린다.
'오늘은 글렀네. 이따 회장님한테 바꿔달라고 문자 보내야겠다'
- 자자, 여기 좀 봐주세요. 안녕하십니까? 김회장 인사드립니다. 오늘 '일요행복산악회'에 참석해주신 선남선녀여러분들! 오늘은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고~
뭐가 되도 되는 날인지 한 명도 안 늦고 이렇게 시간맞춰 와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사분들도 하나같이 다 멋쟁이고, 우리 여사님들도 아주 그냥 너무 고우셔서 제가 눈을 못 뜨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산행 끝나고, 산악회 회원이신 '산너머'님이 잘 아는 식당을 섭외해놨습니다.
안주랑 술 푸지게 준비해놨으니 한명도 빠짐없이 꼭 참석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집생각 하덜말고, 단풍 구경 실컷하시고, 사진도 많~이 찍으세요.
이쁜 얼굴 서로서로 찍어주고! 남는건 사진 뿐이니까...
이런 날 음악이 빠질 수 없지요~? 음악 나오면 신나게 흔들다가 옆에 앉은 사람 얼굴도 한번 찬찬히 뜯어봐요.
오늘내일은 빼도박도 못하는 짝꿍이니까.
이 사람이 내 남편이구나. 내 마누라구나 생각하고,
서로 잘 챙겨주고 이뻐라해주고 그러면 다 좋은 추억으로 남는거 아니겠습니까? 자,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