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이 팀에서만 벌써 아홉번째 있는 일이었다.
굴지의 운송회사 P기업에 입사한지 10년차되는 서른 여섯 임대리는
첫째도 모자라 둘째아이를 가진 걸로 또다시 출산휴가를 냈다.
월요일 아침,
영업 3팀 사무실 안은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이과장, 이력서 좀 들어왔어?"
"네. 열두명 들어왔어요. 서류는 제가 거를까요?"
"아냐. 다 출력해서 일단 나 줘봐. 그리고 증명사진 그거 믿을거 못돼.
요즘 애들은 다 포토샵을 해놔서 실물이랑 많이 다르거든.
20대 중반 어린애들로 추려봐. 면접을 봐야 쓸만한지 아닌지 결정하지."
"네. 알겠습니다. 사실 업무능력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요즘 한글이랑 엑셀 못하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어리고 예쁘고 술 잘먹으면 좋잖아요. 평생 여기서 일할 것도 아닌데"
"그래. 알았어. 알았어"
.
.
.
계약직 여직원 면접날 당일.
제일 먼저 도착한 스물일곱 '지선'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면접부터 붙고 보자.'
대단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현재로선 임시직이든 계약직이든 무조건 들어가야만 했다.
9개월간의 생명연장 기회를 얻어야 했기에.
그리고 그 경력으로 또 다른 곳에 이력서를 넣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아닌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도 물론 계약직이겠지만_
지선에겐 지금 당장 월급 150만원이 필요했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고정 지출때문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했고
저축 따윈 꿈도 꿀 수 없는 생활이 2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첫째, 둘째 오빠의 결혼 비용으로 이미 대출까지 여러번 받은 상태였다.
그동안 쓴 이력서만도 100통 이상.
지선은 스스로의 인생을 하루살이
아니 '한달살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인생
생명권 날짜가 정해져 있는 임시계약직 인생의 연속
'면접'은
'노동력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는 순간이자,
생명연장권을 얻을 수 있는 절박한 기회였다.
"한지선 씨. 들어가세요."
"네"
.
.
.
"한지선 씨. 00대학교 경영학과 나왔네요? 거기 교수 내가 잘 아는 양반인데, 혹시 박둘기라는 교수 알아요?"
"네. 저희과 전공교수님이셨어요."
"아~ 박교수 아직 잘 있나보네. 내가 그 양반 잘 알거든. 같이 강남에서 술도 몇 번 마셨는데.
그런데 지선씨 여기 오기전에 1년간 아무 일도 안했어요? 경력칸이 비어있네?"
"6개월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다녀오고, 나머지 기간에는 배낭 여행했습니다."
"이야~ 집이 먹고 살만했나보네. 영어도 잘하겠네요?
우리 직원들은 토익 점수는 900점인데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해서 말이야.
안그래도 영어 잘하는 사람 뽑고 싶었는데 하하. 술은 좀 마셔요? 소맥 좋아하나?"
"적당히 마십니다. "
"잘 마신다는 말이네. 혹시 우리 중에 술 제일 쎈 거 아냐? 그렇지, 이과장? "
"네. 소장님. 그럴 것 같습니다."
"...."
"한지선씨. 내년이면 스물여덟인데, 결혼생각 없어요? 결혼도 해야할 것 아냐. 그래야 애기도 빨리 낳고 키우지.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없습니다. 아직 결혼생각도 없구요."
"왜에~ 여자 서른 넘어가면 힘들어. 할꺼면 빨리해요. 나이 서른 넘으면 시집 가고 싶어도 못가니까. 내가 딸 같아서 하는 말이야.
우리 딸도 나이가 서른인데 시집 안간다고 얼마나 난린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단 말이야."
"...네"
"워드랑 엑셀은 어느정도 할 줄 알죠? 자격증도 세 개나 있네 보니까. 뭐하러 이렇게 많이 땄어? 요즘 자격증 시험 보는 것도 돈 많이 들던데. 부모님이 지원 많이 해주시나봐. "
"아, 아닙니다. "
"집은 어디에요? 우리 사무실에서 가까워요? 가까운게 제일 중요해. 회식하고 나서 택시비도 많이 나올테니까. "
"집은 00동이라 가까운 편입니다. 버스가 다녀서 출퇴근도 편하구요. "
"그럼 됐네. 알았어요. 나가봐요. 오늘 수고했어요. 합격하게 되면 내일 연락 갈 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몰아치듯 해치운 질문 몇 가지는 하나같이 대답하기 싫은 것들이었다.
이번 면접도 망했구나 싶었다.
저런 쓰레기들이랑은 정말이지 단 하루도 같이 일하기 싫었다.
졸업 후 6개월간 공장에서 일해 번 돈으로 워킹홀리데이와 배낭여행을 다녀온 시간들이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진상 손님들을 대하며 햄버거를 판 돈으로 준비한 자식같은 내 자격증들은
그저 이력서에 몇 글자로 기록될 뿐이었다. 단지 그게 다였다.
고작 그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는 밤낮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그것마저 없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_
하지만, 그들은 나의 가치를 이력서 한 장으로 판단했고,
거기다 계약직 여사원 면접에서는
자격증 몇 개, 토익 점수, 유학 경험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계약직 여직원을 뽑는 면접이란,
그저 사무실에 놓여질 싱싱하고 예쁜 꽃화분을 고르는 일이었다.
그날 혼자 원룸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는
꿀잠에서 헤어나오지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름다운 새 소리가 끈질기게 울려댔다.
"여보세요?"
"네. 여기 00사 인사팀입니다. 한지선씨 영업팀 계약직 면접 합격하셨습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 가능하십니까?"
5초간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지선은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그렇게 바라던 합격인데,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9개월간
나는 버틸 수 있을까?
그때,
길에서 데려온지 1년 된 고양이 '사랑'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배가 고픈지 연신 내 무릎에 머리를 부비댔다.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고양이 화장실 모래들.
텅빈 고양이 밥통과 온기 하나 없는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지금 사람 가릴 처지냐,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
.
.
월요일 아침, 첫 출근을 했다.
간이고 쓸개고 다 집에다 놔두고 간다는 생각으로_
그녀의 눈동자에는 영혼이 없었다.
아침부터 그녀를 기다리는 건 '회식' 통보였다.
술과 담배에 찌든 듯한 30대 남직원 하나가 와서는 오늘 00횟집에서 회식을 한다고 했다.
"오늘은 무조건 회식이에요."
이 사무실에 여직원은 지선 하나였다.
유부남 남직원 일곱에 미혼인 막내 남직원 하나. 그리고 여직원 하나.
첫 출근에 첫 회식.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하루종일 긴장한 터라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가져온 점심 도시락도 먹는 둥 마는 둥_
그래도 이렇게 9개월만 버티면 매달 월급은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무조건 버티기로 했다.
'괜찮아. 남들도 다 이렇게 일하잖아. 너만 그런거 아니야. 무조건 버티자'
그 날 저녁,
00횟집에 모인 영업팀 직원들_
유독 들떠 있는 소장의 상기된 표정.
지선은 괜히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그녀는 회를 먹지 못했다. 날것 자체를 싫어했다.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건 샐러드와 새우튀김 뿐
그마저도 하루종일 긴장한 탓인지 속이 울렁거려 잘 먹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소장이 회 한 점을 권했다.
그것도 아까 자기 발. 주.물.럭.대던 손으로.
회 두 점에 고추와 마늘,
와사비에 빨간 초장이 뒤섞인 상추쌈을 입 앞에 들이 밀었다.
"왜 이렇게 못먹어~ 이거 먹어봐. 내가 진짜 맛있게 쌌거든.
이 이상 맛있을 수가 없어. 여기 회 진짜 싱싱하고 맛있어요. 먹어봐요."
그녀는 토가 쏠릴 것 같았지만, 웃으면서 상추쌈을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먹는 것을 한참을 망설이자, 소장은 또다시
"아~~ 술이 없어서 그러네. 이과장! 빨리 소맥 타봐. 지선 씨 술잔 비었잖아~ "
"네네. 죄송합니다. "
"자. 이번 잔도 전부 다 원샷이야."
그렇게 지선은
소주 반, 맥주 반인 소맥 몇 잔을
횟집에 들어온지 30분도 채 안되어 순식간에 비워버리고
소장의 발냄새가 풍길 것 같은 상추쌈 안주를
빈 속에 구겨넣듯 채워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의미없는 질문들
"지선씨. 남자친구랑 언제 헤어졌어요?"
"남자친구는 몇 명이나 만나봤어?"
"쉬는 날은 뭐해요?"
"버스타고 다니기 힘들지 않아요? 내가 아침마다 태우러 갈까?"
"일하기 힘들면 말해요. 우리 막내 직원이 다 알아서 해줄거니까"
.
.
.
그녀는 웃으면서 양쪽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조건 269일만 버티는거야. 그 이후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