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수능이 끝난 주말에 일어난 일이다. 그 날 학교 앞은 유독 차와 사람으로 붐볐다.
평소 대학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수 많은 희희낙락과 비틀거림이 있었던 금요일 밤의 모습과는 달리, 그 날의 토요일 오후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대학교 논술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그 해 우리 학교 논술전형에는 45,000명 가량이 지원했다고 한다. 아마 그날의 거리는 45,000명의 염원과 긴장감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45,000명의 염원이 모두 전달이 된다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같은 염원을 전달하더라도 누군가는 몇 주 뒤에 불행이라는 답을 받기도 한다. 불행은 참 야속하여, 그날도 거리를 떠돌다가 한 여학생을 강하게 붙잡았다.
오후 2시15분경, 나는 카페로 가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듯한 여학생과 여학생의 부모님이 '저기 아저씨!" 라는 말로 나를 불러세웠다. 아저씨라는 말에 채 당황하기도 전에 이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끝냈다. ㅇㅇ대학교가 어디냐는 질문에 빠르게 손가락으로 알려드렸다. 논술시험이 꽤나 촉박했던 모양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싶었던 나는 고사장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ㅇㅇ중학교' 라고 말하며 여기서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시길래, '아.. 여기서 한 15분정도 걸릴거에요.' 라고 답했다. 물론 뛰면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이 분들이 초행길인걸 감안하면 고사장까지 15분은 족히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내 입에서 '15분'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 여학생은 모든 염원을 잃은 듯 털썩 쓰러져서 격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논술 시험에 늦었고, 아마 입장 조차 못하게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거다. 누군가에겐 가치중립적인 시간의 개념이, 그 친구에겐 세상의 모든 절망이 담긴 개념이었다. 수 년간 오늘을 위해 읽고 써내려간 수 많은 글자가, '15분'이라는 한 단어 앞에 와르르 무너져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부모님의 설득으로 다시 뛰어갔지만, 그 친구의 울음소리는 결코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 오히려 누군가를 울렸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름의 친절이 누군가를 절망에 빠뜨린다는건 참 서글펐다. 그 때의 내가 15분이 아니라 10분이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행을 맞닥드리는 시점의 차이이지, 결국은 같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