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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ㅈ가 Jun 08. 2020

코로나가 종식될 수 없는 이유

*다음 글은 2020년 3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중국에서 쏘아올린 작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휘젓고 있다. 말 그대로 중국‘악’몽이다. 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언제쯤 사그라들지에 대해 다양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진 전염성과 치료 가능성 등 의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예측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의학적 지식이 전무 하다시피한 본인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양상을 예측해보고자 한다. 자연 과학보다는 사회 과학적인 측면이다.   


안타깝지만 코로나 사태는 장기화 될 것이다. 하루 빨리 종식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전 세계인의 열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코로나 사태는 장기화 될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현재 가장 효과적인 확산 방지책은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이다. 단어가 가진 어감이 왠지 모르게 비의학적, 비전문적으로 보여서 그렇지, 가장 효과적이고 쉽게 할 수 있는 확산 방지책이다. 감염의 원인을 차단하는 방법이기에 이보다 효과적일 순 없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기본적으로 운동(movement)의 형태이기에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을 가진다. 즉, 근본적으로 인간의 양심에 성공 여부를 맡긴다. ‘제발 나가지 말아달라.’, ‘부디 옆 사람을 위해 접촉을 자제해달라.’ 고 ‘호소’하는 입장과, 이러한 부탁을 듣고 할지 말지 ‘결정’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 추세다. 호소하는 입장보다는 결정하는 입장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의 양심은 역사적으로 실패해왔다. 물론 인간의 양심이 승리한 경우도 더러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현 상황에서 양심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보상 심리때문이다.

본격적으로 1월부터 지금까지 몇 달간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매일 날아오는 재난 문자는 더 이상 위기감과 긴장감을 만들지 못한다. 그저 “또?” 라는 피로감만 만들고 있다. 피로감은 자연스레 보상 심리를 만든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이정도는 보상해줘도 되겠지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의료인을 비롯하여 전 국민이 고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고생이 줄어드는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상 심리를 만들어낸다. 벚꽃도 폈는데 한 번쯤은, 날씨도 좋은데 한 번쯤은. 나는 고생했으니까 말이다. 명확히 끝이 보인다면 이 욕구를 조금이나마 참을 수는 있다.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 현재의 욕구를 미래로 미룰만한 동기가 부족하다. 끝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이러한 보상 심리는 자연스레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이끌 것이다. 참아왔던 사회적 동물의 본능을 터트릴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참으로 안타까운건,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하는건 단 하나 없다는 점이다. 내가 고분고분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실질적으로 변하는 건 없다고 느껴진다. 나의 참여도와 이에 따른 성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 줄어드는 확진자의 추세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줄어드는 확진자 수에 내가 기여했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서다. 오랜만에 나간 한강에 가득찬 사람들. 여전히 만석인 유명 맛집. 강남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 빼곡히 서 있는 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지키지 않고 있는데, 과연 나 하나 지켰다고 확진자가 줄어든건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문은 자연스레 나를 어리석은 존재로 만든다. 어느 순간 나는 고분고분한 바보가 되어 있다. 밖을 나가보니 나만 바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바보가 되기를 거부한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우리나라의 방역/의료 시스템도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

2월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은 나라였다. 하지만 3월부터 유럽과 미국 지역에서 빠르게 바이러스가 퍼졌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순위권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워졌다. 중국과의 접근성과 우리나라 인구를 고려하면 상당히 선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럽과 미국의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나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선진화된 의료시설과 발빠른 방역시스템은 세계 어디와 비교를 해도 돋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대적 우위는 오만함을 만들 수 있다. ‘다른 나라는 그러한데 우리나라는 괜찮더라.’ 라는 자위 때문에 바이러스에 대한 위기감과 긴장감이 느슨해질 수 있다. 2월까지만 해도 정말 큰 일 날 것 같던 분위기는 이제 일상이 되었고, 다른 나라의 확진자 추이는 오히려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한때는 하루에 확진자가 10명이라도 늘면 지구가 멸망할 듯이 불안해했는데, 지금은 확진자가 50명 늘어나면 오히려 안심하는 형국이다.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인데 안심을 하고 있다.          



슈퍼전파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대구/경북을 감염지역으로 만들었던 한 사람의 슈퍼 전파자처럼, 또 다른 슈퍼 전파자는 반드시 나올 것이다. 3x번 확진자는 수많은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이유로, 그리고 특정 이단 종교단체 소속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슈퍼 전파자가 되는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저 본인의 감염여부를 모른 상태로 이전과 똑같이 일상생활을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슈퍼 전파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느 순간 내가 다닌 곳은 감염지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전 세계 모든 확진자는 누구 하나 의도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고, 그것이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을 뿐이다. 감염 여부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조기에 조치를 취했나 못했나 정도의 차이뿐이다. 지금 코로나와의 싸움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 내가 감염자라는 피해자가 된 순간, 나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기 시작한다. 물론 누군가는 현명하게 대처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진 못하다. 내가 가해자가 될 거란 생각은 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슈퍼전파자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사태가 잠잠해질 때쯤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슈퍼전파자가 큰 소동을 일으키고 겨우 잠잠해질 때쯤 또 다른 슈퍼전파자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물론 위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으면 한다. 당장이라도 종식되어 전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에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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