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씨앗의 행방
그의 마지막 길에 던져야 했던 하얀 국화는, 차라리 내게 쥐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어둠은 언제나 내게 친숙한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라 믿었던 것들도, 사실은 타인의 눈을 의식한 가증스러운 위선이었을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맑은 물줄기처럼 청렴하게 살았다고, 아버지는 늘 그렇게 떳떳해했다. 과연 그랬을까. 그 청렴함이 혹,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기기만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나 또한 그 뿌리가 썩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보세요. 당신의 씨앗은 결국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썩은 뿌리에서 싹을 틔울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당신은 정녕 몰랐던 것입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입니까. 그게 더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당신의 삶이, 결국 당신의 자랑과는 아무 상관없었던 비참한 패배였다는 것을.
너무 일찍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무엇이 그리 아쉬워 당신의 생명은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서둘러 져야 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씨앗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차마 발아시킬 용기가 없어, 그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까.
치맛자락을 물어다 주며 내 곁을 지키겠다고 했던 약속은, 결국 허무한 맹세였을 뿐. 당신은 한 평생 그저 뿌리만 내리다 떠났습니다. 나에게는 이 썩어가는 뿌리만이 남았는데, 이제 와서 이 썩어가는 뿌리를 잡고 햇빛을 쬐어본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내 손에 새하얀 국화꽃을 쥐여주었고, 나는 그 꽃을 당신의 관 위에 던져야 했습니다.
당신은 최소한, 나에게 그런 짓은 시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남겨준 것은 오직 이 썩은 뿌리뿐인데.
그저 당신의 딸이었단 이유 하나로 이렇게나 고통스러울 줄은.
나는 이제 어찌할 바를 몰라, 당신이 남긴 썩은 뿌리 곁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1983. 09. 30
미사와시의 한 주택가, 허름하지도 크지도 않은 집. 다정하기만 했던 당신의 손길이 닿았던 모든 것들은, 당신이 사라진 지금, 낯설고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 눈앞에서 당장 그 서재에 간다면 당신이 나를 반겨주며 환히 웃어줄 것 같은 그 따스함에 녹아 없어지고 싶은 심정을 이젠 느낄 수 없음을. 참으로 뼈 아픈 이별이다.
그리 다복하지도 유복하지도 못했지만 세상 청렴함 하나로 올곧게 살다 저문 나의 아버지
두 어달 간 뒤부터 정리해야지 했던 유품들은 죄다 정리했다고만 했는데, 유달리 그 서재의 추억 때문일까
이상하리 만큼 집 안에서의 물건들은 정리하지 못해 벌써 두 번째 떨어지는 낙엽들을 쓸어내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달라야 한다. 겨울을 맞이해야, 집에 또 다른 봄을 선물해 줄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사 계획은 그렇게 순조롭진 못했지만, 자꾸만 여기에 남아있다면 갈대 같은 내 마음이 자꾸만 나를 과거에 묶어두고서 영원히 가을에서 살라고 말하고 싶어 할 것 같아, 정말 본의 아니게도 집을 팔아버렸다.
그러니 이젠 별 수 없다.
하나 둘, 그 다정하고 다복하며 청렴한 나의 아버지와의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함을.
1983. 10.7
어느 정도 소각이 끝이 났다.
옷가지들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들은 이웃들께 선물하고, 읽지도 못할 그 서재 속 어렵디 어려운 책은 기증하거나 태워버렸다. 더는 그 정겹던 책장의 냄새 또한 나지 않는다. 독한 마음의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유달리 아직도 손을 못 대는 건 역시나 존재한다. 침구류나 책상만큼은, 마치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서일까. 도무지 손을 대진 못하겠다.
다만, 서랍 속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했다. 그 사진첩의 가장 깊은 곳, 바스러질 듯한 종이 한 장에 당신과 함께 웃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갓 피어난 국화처럼 맑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사진 뒤편에는 꾹꾹 눌러쓴 글씨가 보였다.
"미안해 당신, 우리 딸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어."
당신의 글씨였다. 하지만 그 말은 내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유복하게 자랐다고 믿었던 이 평범한 집, 상냥하기만 한 어머니와 다정하기만 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믿었던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만들어낸 가짜 평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 속 여인의 용모는 줄곧 나와 함께 자랐던 나의 어머니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씨앗'은, 나를 위해 당신이 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씨앗은 애초에 당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러다 당신이 종종 쓰던 일기장이 있음을 번뜩였다.
이걸 본 이상, 그 일기를 보지 않을수가 있으랴.
황급히 태워버리려던 책들 속에서 급히 찾은 두껍디 두꺼운 그을린 일기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리며, 일평생 따스함과 청렴함을 강조하고 나를 굳건히 지켜냈던 나의 지지대는
얼마나 그리 아프고 시리며 썩어 문드러진 삶을 살았던가.
비참하고 구슬프기만한 삶을 어찌 이리도 단단히 버텨온것인가.
하지만 차마 당신이 일기장이라며 토해놓은 이 고백들에는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던 당신이 부끄러워지기만을, 한없이 내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첫장이 무려 이러 했다.
" 유키코가 죽은 오늘부터 이 고백을 시작하려한다. 앞으로의 모든 일들이 아마도 가면으로만 살아가야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딸을 위한 선택이였다고 말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긍지이자, 선택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그게 정녕 나의 딸이 후에 끝없이 나를 부끄러워 할지라도."
일기를 다 읽고 난 뒤, 나는 한 없이 끊임없이 당신을 부끄러워 해야만 했다.
그리곤 생각해고 결론지었다.
나는 앞으로 이 집을 떠나 살아야한다. 과거를 묻고 살아야한다.
정말이지, 묻고 물어 결국엔 묻어버리고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그리 생각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당신의 씨앗에서 벗어나 살아야 했었다.
이게 나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