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이 식기 전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려야 할 때,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의 늪에서 재빨리 나를 건져내야 할 때. 언제나 그랬듯 익숙한 불행이 다가오면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저 깊은 바닥을 헤매다 끝내 결과의 책임을 지겠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마음. 때로는 그것이 나의 치부였고, 때로는 비겁한 합리화였으며, 가끔은 그렇게라도 해야 멋져 보일 것 같아 내뱉던 말이었다.
하지만 왜, 너는 곧잘 그 마음을 그리도 안다는 듯 그렇게 빤히 눈을 보며 울어주는가.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다. 네가 나를 궁금해하길래, 단지 그게 신기해서. 나는 무릎 위에 놓인 내 손등의 핏줄만 빤히 내려다보며 묵묵히 말했을 뿐이다.
겪지 못할 아픔을 겪었다, 말하지 못할 슬픔을 겪었다, 그저 지나가버린 일들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담담해졌기에, 그저 묵묵히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적을 깨고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 시선은 그녀의 신발 끝에서 멈춰 섰고,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왜 울고 있는가. 더는 슬프지 않다는 것을 끝끝내 변명을 하고 있는가. 다 괜찮아졌다며,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는다며.
이제는 웃는 얼굴과 무표정 이외엔 남아있지 않게 되어서 그럴까. 네가 울고 있는 모습이 이미 메말라버린 감정이라 생각했었어서, 살아남는 데 필요가 없는 감정이어서, 애써 무시하고 피하다 결국 흐려졌는데. 왜 이리도 내 마음을 당황스럽게 하는가.
굳건해야 했다. 언제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렇게 된 이유도 원인도 있겠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겠지. 잘못된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 업보가 쌓였겠지. 전생의 내가 잘못을 했겠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하며.
불운이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아직은 내가 세상에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저기, 그만 생각해도 돼."
"더는 네 잘못이 아니야."
무슨 소리인가. 내가 원인이며 내가 결말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거칠게 요동쳤고, 미처 다스리지 못한 감정이 뜨거운 숨이 되어 콧날을 스쳤다. 나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인 '책임'을 그녀가 단숨에 뽑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고, 어금니를 꽉 깨문 턱 근처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잘못이어야 했고 다른 이유가 어떤 게 되더라도 나여야만 했다. 당신이 뭔데 그걸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왜 그렇게 말하는데."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는 명분이고 원인이라면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리 말해도 어찌 뭐가 달라지겠는가. 사연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경중 따윈 개나 줘버리라 한들 어차피 누구나 힘든 일은 존재했을 테니.
무조건 무거우리란 법도, 가벼우리란 법도 없는 게 사람의 힘듦일지고, 세상살이 새옹지마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듯, 떨어져도 배만 띄운다면 부서지지는 않으리. 근데, 도대체 네까짓 게 뭐라고. 이 진리를, 원인을 다 무시하고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며, 그 결과는 틀렸다며 내게 부정을 들이미는가.
"이제 내려놓아도 괜찮아, 유우지.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거든 항상. 왜라고 물으면, 이 정도 대답이려나."
"그냥 이유는 몰랐어. 사실 네가 누군지 모를 땐 좀 재미없고 무척 삶에 진지하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정말 네 말대로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네?"
아. 생각이 너무 지나쳤다. 그녀의 말은 그저 위트인 건가. 이야기가 많이 슬플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내가 조절하지 못한 탓이었으려나.
"또, 또 그 생각 많은 표정."
"아니야, 내가 뭘 생각이 많다고 그래. 미안해, 내가 또 너무 여과 없이 이야기 한 것 같네."
"풉. 이해해,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그러겠다."
가끔 돌이켜보면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포인트에서 종종 웃긴 했다. 이야기가 슬프기만은 하지 않았던 걸까.
"왜 웃는 거야...?"
"있잖아, 넌 자신감이 좀 필요할 거 같네."
무슨 말일까.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자신 없었던 일은 딱히 없었다.
"그 태도, 충분히 멋져. 그렇다고 생각해. 남들은 보통 조금이라도 싫으면 남 탓을 찾기 마련인데, 유우지 당신은 항상 내면부터 찾으니 말이야. 음... 무척 단단하다랄까."
"단단하다니.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입술 사이로 날 선 반문이 튀어나왔다. 단단함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이건 그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한 겁쟁이가 스스로를 벽 안에 가두고 채찍질하며 버티는 고집일 뿐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 만든 감옥을,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태도'니 '멋지다'니 하는 근사한 말로 포장하고 있었다.
"그냥... 남 탓을 하는 게 더 괴로워서 그래. 그건 단단한 게 아니라 비겁한 거야."
나는 끝까지 내 불행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애썼다. 원인이 나에게 있어야만 이 엉망진창인 결과들이 납득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 날카로운 반항을 보드라운 솜사탕처럼 가볍게 받아낼 뿐이었다.
"비겁한 사람이 자기 내면을 그렇게 낱낱이 파헤친다고? 에이, 유우지. 너 자신한테 너무 박하다니까."
그녀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너무 맑아서, 내가 세워둔 인과관계의 성벽들이 마치 햇볕 아래 얼음 성처럼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야 하는데,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꼿꼿하게 세웠던 등허리가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맥없이 내려앉았고,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애꿎은 뒷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를 찢어발기던 그 날카로운 논리들이 고작 그녀의 위트 섞인 칭찬 한 마디에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더니..."
"응?"
"네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결과가 생기잖아. 책임
져."
나의 투덜거림에 그녀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 끝에 매달린 다정함이 내 안의 날 선 의문들을 하나둘씩 재우는 것 같았다. 그래,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찢어가며 버텨온 그 지독한 시간들이 '단단함'이라는 원인이 되어, 지금 내 앞에 웃어주는 너라는 결과를 데려온 것일지도.
그렇다. 결국 내가 원인이며, 내가 결말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