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특정 부위에 전극을 심어 전류가 흐르는 버튼을 누르면 쾌락을 느끼게 설정한 실험에서 쥐는 다른 모든 생존활동을 잊은 채 버튼만 계속 누르다가 죽는다. 쾌락만이 쥐를 자극했고 중독시켰고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노력 없이 단순하고 편리하게 느낄 수 있는 쾌락은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한다. 작품 속 시민들의 모습이 이 실험의 실험용 쥐와도 같은 모습이다. 다른 모든 활동을 무시하고 버튼만 누르다가 죽는 쥐마냥 자극이 아닌 그 무엇도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어느 작가는 한 방송에서 뇌의 생존을 위한 활동을 '본업'으로 그 외의 인간만이 하는 특수한 것들을 '부업'이라고 표현하며 인간과 동물을 구별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생존활동 외의 것들이다. 그는 그것을 '자기이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그렇게만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이라고도 표현되고 지혜라고도 하고 철학, 문학, 과학… 끝도 없이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것들을 널리 전하고자 하는 도구가 책이다. 책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이 담긴다. 책이 아니라 책에 담긴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책은 도구일 뿐이다. 작품 후반 그레인저와 그들 무리를 만난 주인공은 읽은 책은 불태워버린다는 그들의 방식을 듣고 당황하지만 정작 그들은 태연하다. 책으로 전할 수 없으면 책으로 전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해서 말로 전달하면 되고 뭐...여러가지...파피루스...
전쟁과 핵폭발 때문에 모든 것이 초기화된 상황에서 그들은 마치 초창기 인류 혹은 새로운 문명의 시작, 광야의 유대인들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가나안’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긴 세월을 버틴 유대인들처럼 숲속 사람들은 언젠가는 올 ‘정오’를 기다리며 강의 상류를 향한다. 그들은 각자의 가나안을 향해 만나와 베이컨을 먹으며 견딘다.
“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상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장 2절
작품은 요한계시록의 일부를 인용하며 끝난다. 숲속 사람들의 여정이 열매를 맺을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암시하면서. 강의 상류로 진로를 튼 그들은 생명나무를 심으러 간다. 생명나무의 씨앗은 책에 담겨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나무가 되어 계시록을 실현할 것이다.
작품 속 미친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너무나 닮아있다. TV에서는 온갖 자극적이고 역겨운 프로그램들만을 송출한다. 연애와 사랑을 분리해 저속화하고 인간을 무대 위 서커스 원숭이처럼 비추는 쓰레기 방송들이 줄을 잇는다. 쓰레기 방송들이 주류가 되고 가치 있는 것들은 비주류가 되어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화씨 451』의 희망적인 결말과는 다르게 우리의 현실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이 책 자체가 밝은 미래를 예언하는 우리들의 계시록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