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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by 김감감무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면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알듯 말듯 하고 보일 듯 말 듯 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읽어도 뚜렷하게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듯'함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안개를 허우적거리며 걷는 마음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그저 어렴풋이 어떤 소심하고 상처받은 사람의 슬픈 기운이 느껴질 뿐이다.

이 책 한 권 분량의 편지가 그 안개로 자욱한 미로의 북극성이 되어주는듯했다. 이 책 한 권 분량의 편지는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왜 나를 무서워하는지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카프카의 대답이다. 카프카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자신의 상처를 누구의 책임이라고 따지지 않는다. 아니, 아버지와 자신 모두의 책임이라고, 공평하게 둘 다의 책임이라고 나눠서 짊어지자고 한다, 원망이나 호소가 아닌 대화이자 대화의 시도다. 큰 사람의 태도는 이런 것이지 않을까라는 조금은 뜬금없는 생각도 좀 들었다.

또한 이 편지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분석이자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처지나 성향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그런 의도의 글이 아니었지만 이런 과정과 결과가 출판됨으로써 독자는 그의 다른 작품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갈피를 잡을 수 있게 된다.

편지는 전해지지 못함으로써 내용이 그의 삶과 더 어우러지는듯해서 또 한 번 서글퍼진다. 전해지지 못해서 더 그럴듯한 편지라니. 그런 편지가 얼마나 더 많을까. 도저히 전달될 것 같지 않은 칙명이 이 편지였지 않을까, <법 앞에서>의 문지기는 그가 자라며 느껴온 아버지의 숨 막히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이러저러한 생각이 든다. 카프카 본인이 말씀하시지 않는가. 자신의 글쓰기 주제는 아버지라고.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지만 제2의 아버지가 아니다. 아들은 그 자신이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이 될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부자 갈등의 이야기를 우리는 몇 가지 더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마다 쓴 적은 없지만 나도 이런 편지를 마음 한편에 품고 있는 건가 싶다. 서글프고 서글프다. 안개 너머에 있던 그 어렴풋했던 슬픔이 이제는 조금 보이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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