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은 독자 친화적인, 즉 친절해야 한다. 잘 읽혀야 하고 읽히기 위해서 쓰는 글이 있다. 세상에는 그런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다. 어떤 글은 그저 투명하다. 투명하다는 것은 작가의 내면의 그 정리되지 않은 온전한 날것 그대로의 것을 그대로 꺼내놓기만 한 텍스트를 말한다. 어떤 가공도 되지 않은, 읽힐 것을 고려하지 않고 쓰려고만 해서 쓴 글도 세상에는 있다. 그리고 어떤 독자들은 그런 것을 읽고자 한다. 이 책이 그런 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읽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도록 억제된 것은 분명 다르다. 저자는 자살을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문제로 바꾼다. 자살이 스스로를 살인하는 행위가 아닌 삶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주체성의 회복 혹은 강화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선을 넘을랑말랑하는 줄타기를 하는듯한 책이었다. 자살을 예찬한다고 받아들인 독자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데 그런 반응이 충분히 나올만한 것 같다. 이 자살을 앞둔 사람의 유서와도 같은 책이 정말 삶을 위로할까. 본인을 위한 위로의 글이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아닌, 그냥 그런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뭘 읽든 간에 여기저기서 태어남은 태어나짐이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그 사이의 선택들이 삶이라는 생각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인류의 모든 진지한 고민은 태어남의 당함으로부터, 그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나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어려운 이유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당하기도 하지만 내가 다가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과는 다른.
아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자꾸만 시간을 두고서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까. 이유도 잘 모르겠다. 다음번에는 알게 될까. 우선은 살아내고 다시 보자.
김희상 선생님이 다루신 책들은 하나같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