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작가님 본인께서 어느 북토크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소설에는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이동은 여행일 수도 있지만 그의 소설에서 여행으로써의 이동은 잘 나오지 않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이동이 여행이기 위해서는 저곳을 향하다가도 원할 때 이곳으로 안전히 돌아올 수 있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승우의 인물들은 여행으로써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을 하거나 있을 수 없거나 돌아갈 수 없어서 저곳을 향한다.
쫓겨나기도 하고 스스로를 쫓게끔 만들기도 하지만 이곳에 있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이곳에 저지른 죄가 그렇게 한다. 죄가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한다. 죄는 연인에게 지은 죄, 아버지에게 지은 죄, 누군가에게 지은, 세상에 지은 죄 등의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캉탕』의 세 인물은 『생의 이면』의 박부길을 세명으로 표현한 것과 다름 아니라고 하면 잘못 읽은 걸까. 소설이, 모든 소설이, 모든 글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어떤 인물이든 나의 부분이자 자기 자신이니 세 인물로 표현한 하나의 인물이라는 표현은 그리 틀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저지른 죄가 과거 자체가 된다. 죄가 아닌 과거는 현재에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된다. 그저 때때로 찾아와 좀 감상적인 무드에 빠지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 힘이 없다. 죄인 과거만이 현재까지 영향력을 끼친다. 죄인 과거이자 과거가 죄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느닷없이(본인에게만) 찾아와 현재의 내 목을 조여온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치듯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 죄가 나를 목조여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해. 세상의 끝을 향해.
세상의 끝에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도달할 수 없는 앞을 가고 또 가다가 정말로 만약 앞을 정복해서 세상의 끝에 도착해서 보게 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나의 뒷모습이지 않을까. 마침내 떨쳐내고 영혼은 바다에 남겨지고 몸만 구출된 것이 아니라 "익사한 것은 그의 육체이고 구출된 것은 그의 영혼이 아니었을까"라는 핍이 도달한 곳. 그것이자 그곳에 대해.
이 글의 두서없음이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이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전히 어렵고 잘 모르겠다. 『캉탕』은 여전히 어렵다. 그런데 참 좋다. 나는 왜 자꾸만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반가움을 느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