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방은 죽을 걸 알면서도 불에 뛰어들죠”라는 <선리기연>의 대사를 어린 날의 나는 ‘실패할 사랑’에 빠진 자의 비극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미숙한 당시의 이해를 조금은 나아졌는지도 모를 지금의 내가 다시 고쳐 보자면, 그것은 ‘실패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패’를 감내하는 자의 결의이지 않을까.
사랑에는 실패가 포함된다. 극복할 수 없는 단절, 불가능한 회귀 앞에서 좌절하는 하나였던 둘의 좌절이 사랑의 실패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흔하고 정석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들의 실패는 함께하는 실패다. 그들이 만들어 낸 연애의 실패. 각자 인물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공동의 사랑을 만들고 그것의 죽음을 함께 겪는다. 이승우의 <사랑의 전설>이 그러한 소설이었고, 작가는 그런 전통적인 연애소설을 써내며 느낀 자신의 “뻣뻣함”을 민망해했다.
<욕조가 놓인 방>은 어떤가. 이것은 연애소설일까. 연애소설이고자 했지만 아닌 무엇일까. 어쨌거나 전형적인 사랑에 대한 소설은 아니다. 보통의 연애소설이 ‘사랑’ 혹은 ‘사랑의 실패’에 집중한다면, 이 소설은 ‘실패’에 집중한다. 무엇이 그들의 사랑을 실패하게 했는지에 대하여.
물 위를 걷고 싶어 하는 남자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여자. 의식적인 남자와 무의식적인 여자. 그들의 대비는 연인의 적당한 대비가 아닌 극과 극의 대비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한 번 우연히 부딪혀 만들어진 불똥 같은 연애라 하기에는 한참 부족하고 흐릿한 무엇이다. 그녀와의 괴리는 연인 간의 단절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타인으로서의 분리이자 다름이다. 자기합리화, 명분, 이해 같은 것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의식적인 남자는 여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목련공원>의 그녀가 그저 욕망일 뿐이라면 <욕조가 놓인 방>의 그녀는 태초를 향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의 영역이 아닌 것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른 둘이다. 아닐 운명인 둘이다. 그래서 그들의 실패 이야기에는 신파적인 무엇도 없다.
<생의 이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인 박부길이 그녀를 폭행하는 장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사람이 다면적이듯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도통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하기 버겁다. 사랑을 표현한 무엇이든 장님 코끼리 만지는 꼴이지 않을까. 이승우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복잡하고 깊다. 근데 난 그의 글을 읽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 가본 적 없지만 아는 길을 가는 듯하다.